"작품 준비하며 찾은 서대문형무소, 공연 중 돌연 눈물 났다"

[인터뷰] 연극 <정의의 사람들>의 '스테판' 역을 맡은 배우 김준식

알베르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이 무대에 올랐다. 1905년 러시아 혁명기에 있었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총독 암살 사건을 모티브로 쓰인 연극이다. 암살을 주도한 사회혁명당 소속 전투 조직원 야네크, 도라, 야넨코프, 부아노프 등이 연극에 그대로 등장한다. 여기에 알베르 카뮈는 스테판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연극에 등장시키며 정의와 혁명을 둘러싼 이들의 첨예한 논쟁을 밀도 높게 표현했다.

지난 1월 18일 서울 종로구 링크아트센터 드림4관에서 개막한 <정의의 사람들>이 한창 공연 중인 가운데, 27일 스테판을 연기하는 배우 김준식을 만나 작품과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준식은 총독 암살과 혁명에 대해 한 치의 물러섬도 용납하지 않는 완강한 태도를 보이는 스테판을 원캐스트로 연기하고 있다. 그는 스테판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연극에 등장시킨 알베르 카뮈의 의도를 나름대로 고민하며 캐릭터에 접근했다.

"제가 감히 생각하기에 알베르 카뮈는 스테판이 아니라 도라, 야네크, 야넨코프, 부아노프 등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정의를 더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그와는 반대되는 스테판이라는 인물을 창조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스테판이 하는 반박이 감탄스러울 정도로 정성껏 쓰여있어요."

야네크는 총독이 탄 차에 폭탄을 던지는 임무를 부여받지만, 차 안에 총독의 조카들이 함께 타있는 것을 보고 폭탄을 던지지 못한다. 스테판은 그런 야네크를 몰아붙이고 자신이 폭탄을 던지겠다고 나서지만, 조직을 이끄는 야넨코프는 냉철하게 중재하며 다시 거사를 도모한다. 언뜻 보면 김준식이 연기하는 스테판은 야네크와 가장 많이 토론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도라와 나누는 대화가 훨씬 많다. 김준식은 도라를 "다정함과 사랑,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설명하며 "도라는 스테판이 잃어버린 사랑을 지키고 있다"고 부연했다.

김준식이 말하는 스테판

스테판의 인생에는 3년 간의 감옥 생활이 큰 영향을 미쳤다. 스테판이 혁명과 정의에 대해 완강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도 감옥 생활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감옥에서 스테판에게 동료 죄수와 마주본 채 서로에게 채찍질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당시의 참혹했던 경험이 스테판을 고장내 버렸다.

"상상해보건대 처음에 스테판은 채찍을 내던졌을 것 같아요. 서로에게 채찍질하는 걸 거부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후로 모진 학대와 고문을 받으며 죽음의 문턱에 내몰렸을 것이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채찍을 들었을 것 같아요. 이때 무기력함과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비참하고 비굴한 자신을 보았을 거예요. 그래서 출소한 이후에 동료들을 몰아붙이는 완강한 모습은 비단 동료들을 향한 것일 뿐 아니라 스테판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해요."

스테판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보니 연기하는 배우 입장에서 처음에 무엇을 쫓아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김준식은 "스테판이라는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감옥의 삶을 많이 찾아봤다"며 작품을 준비하며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기도 했다고 밝혔다. "어느 날 공연하는 도중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봤던 현장과 사진이 스쳐 지나가며 눈물이 돌았다"고 덧붙였다.

감옥에서 돌아온 스테판은 엎어진 의자를 쳐다본다. <정의의 사람들>에서 의자는 각 인물이 투영되는 상징적인 요소다. 무대 뒤에 쌓여있는 의자는 이미 떠나간 동지들의 흔적이고, 십자가가 그려진 벽은 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인물의 행동과 상황에 따라 의자의 상태도 달라지는데, 엎어진 의자를 바라보는 스테판에 대해 김준식은 "감옥에 가기 전의 스테판은 실패란 없고 자신만만하다. 그런데 지금은 몸도 마음도 고장나있다"고 설명했다.

 연극 <정의의 사람들> 공연 사진
연극 <정의의 사람들> 공연 사진(주)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함께 호흡하는 동지들

김준식은 "스테판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는 야네크와 닮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데 이어 "감옥에 가기 전에는 도라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정도 쌓았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만큼 감옥에 다녀온 이후로 스테판의 삶은 달라졌다. 스테판은 거사를 위해 마음의 문을 단호하게 닫았지만, 주변 인물들은 마음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린다. "망가진 스테판을 향한 동지들의 사랑이 계속 쌓인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스테판이 그토록 던지고 싶어했던 폭탄을 도라에게 양보할 수 있을 정도의 동지애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조직을 이끄는 야넨코프가 스테판에게 "네가 대장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김준식이 가장 울컥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고. "그런 세상이 올 수만 있다면 너나 나 같은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스테판의 말에 "우리는 그 무엇"이라고 반박하는 야네크의 대사도 마음을 울린다고 고백했다.

김준식은 원캐스트인 데 반해 야네크(정지우·이서현)와 야넨코프(이정화·이예준)는 더블 캐스트다. 호흡을 맞추는 동료 배우에 따라서도 받는 느낌이 다르다고 밝혔다.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거사를 위해 떠나는 야네크를 보내주는 스테판의 심정에 대해 "(정)지우의 야네크를 보고 있으면 진짜 보내기 싫은 동지를 보내는 느낌이어서 짠하다. (이)서현이의 야네크에게서는 경이로움이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정화의 야넨코프에 대해서는 "차갑고 냉철한 눈빛 속에서 고장난 스테판의 마음에 붕대를 감아주는 게 느껴진다. 스테판은 계속 붕대를 풀어내야 하는데,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고 밝혔다. 이예준의 야넨코프와 호흡을 맞출 때는 스테판이 야넨코프에게 호소하는 장면에서 "마음 속으로 '형, 그래도 해야 하잖아, 알잖아!' 하고 부르짖으며 호소하고자 하는 충동이 생기기도 했다"며 각기 다른 매력을 설명했다.

특히 이정화는 연습 과정에서 "스테판은 푸른 불꽃"이라고 표현하며 김준식이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김준식은 "과거의 스테판이 빨간 불꽃이라면, 감옥에서 나온 스테판은 꺼졌다 다시 피어오르려 하는 푸른 불꽃이라는 누나의 말씀이 도움이 많이 됐다"고 털어놨다. 여기에 더해 "김수로 대표님과 김결 연출님이 고전을 대하실 때 인물 하나하나의 삶을 깊게 보시고 살려주시려고 한다"고 작업방식을 설명한 김준식은 "덕분에 짧은 대사에서도 인물의 삶이 엿보인다"고 덧붙였다.

 연극 <정의의 사람들>에 출연 중인 배우 김준식
연극 <정의의 사람들>에 출연 중인 배우 김준식(주)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김준식이 전하는 고전의 매력

<정의의 사람들>은 연극의 고전으로 여겨진다. 김준식은 대학에서 연기를 공부하던 시절부터 고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고 전했다. 캠퍼스 내에 있는 노천극장에서 혼자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연기해보기도 했을 정도다. 그런 만큼 <정의의 사람들>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남다르고, 이 고전이 오늘날 던지는 화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삶의 끝자락에서 세상을 향해 정의, 혁명, 인류애를 외치는 연극이에요. 그것도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요. 김수로 대표님께서 고전이 지금 여기에서 왜 실연되어야 하는지 강조해주세요. 그 말씀을 <정의의 사람들>을 하면서 피부로 느끼고 있어요. 누구보다 내가 중요해진 시대에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계속 보여진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연극이라고 생각해요."

한 세기 전 실화를 모티브로 한다는 점에서 거리감을 좁히는 노력도 필요했다. 그는 "<정의의 사람들>은 연기의 테크닉만으로 다 이루어질 수 없는 작품이다. 머리가 아니라 피부로 작품의 공기를 느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시도와 많은 노력을 거듭했다고 밝힌 김준식은 "피부에 와닿았을 때 '와, 됐다' 하기보다는 숙연해지고 짠해졌던 기억이 있다"고 고백했다.

김결 연출가는 배우들에게 연기를 통해 정면돌파할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특히 "공연이 끝날 때까지 파던 땅을 계속 파라"는 지시는 김준식으로 하여금 <정의의 사람들>이 "공연을 할수록 더 깊어지는 모습을 보며 앞으로의 내 모습을 더 기대하게 하는 작품"이 되도록 만들었다. 김준식은 "나를 온전히 만족시키는 작업을 하자고 다짐하며 <정의의 사람들>로 올해를 시작했다"고 밝히며 다음과 같이 전했다.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릴 때의 이야기를 배우 생활의 이정표로 삼고 있어요. 제자가 보기에 천장화가 완성된 것 같은데 미켈란젤로가 구석을 계속 신경쓰고 있었대요. 그래서 제자가 '아무도 모릅니다' 하고 말하자 미켈란젤로가 '내가 안다'고 답했다는 거예요. <정의의 사람들>을 통해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을 거듭하며 미켈란젤로의 일화를 몸소 느끼고 있어요. 저를 모질게 몰아붙이며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사랑하면서 연기하고 있습니다."

김준식의 2026년을 연 연극 <정의의 사람들>은 2월 22일까지 공연된다.

 연극 <정의의 사람들> 공연 사진
연극 <정의의 사람들> 공연 사진(주)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공연 연극 정의의사람들 김준식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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