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혀도 되는 이야기가 있다면 읽혀선 안 되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다. 19세기 말 조선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태에 대한 적나라한 이야기가 떠돌자, 위정자들은 이를 억압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이야기의 근원지는 '매설방'으로 뮤지컬 <판>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양반가의 '달수'가 우연히 매설방 앞에 다다르며 시작된다.
달수는 이론서를 공부하고 급제해 관직을 얻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덕'에게 반해 그녀를 따라가다 매설방 앞에 당도했다. 매설방에는 그동안 달수가 보지 못한 소설들과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전하는 전기수가 있었다. 그들이 말하고 읽는 이야기에는 그동안 달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삶,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통렬한 풍자, 그리고 때론 외설적인 이야기까지 가득 담겨있었다.
달수는 매설방에 자신의 모든 관심을 쏟아붓는다. 과거 시험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에 더 흥미를 느꼈고, 직접 전기수가 되어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꿈을 품게 된다. 그렇게 매설방 주인 '춘섬', 최고의 전기수 '호태'를 비롯한 매설방 사람들과의 동행이 시작된다. 위정자들의 검열과 아버지의 감시를 요리조리 피해 다녀야 하기에 위태로운, 그러나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야기들로 가득하기에 흥분되는 여정이 펼쳐진다.
▲뮤지컬 <판> 공연 사진
아이엠컬처
드디어 드러나는 감춰진 이야기
달수가 전기수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전기수로서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들과 달수는 엄연히 계급 위치가 다르다. 여전히 신분제가 남아있던 시대이기에 양반 달수의 삶과 전기수의 입에 오르내리는 평민의 삶은 확연히 다르다. 달수는 평민들의 삶을 살아본 적 없고, 생활 세계 역시 구분되어 있었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이야기를 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전기수 호태는 달수를 뒷골목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달수는 이론서에 담기지 않았던 보통 사람들의 삶을 확인한다.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패관소설에는 이런 삶이 적나라하게 담겨있었지만, 위정자들은 이 소설이 지나치게 외설적이고 세태를 풍자한다는 이유로 금지했다.
그렇기에 달수에게는 호태를 통해 뒷골목을 경험하는 과정이 더 필요했다. 다른 삶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완전하진 않더라도 동화되는 과정이 뒷골목에서 벌어진다. 동시에 매설방 역시 이런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매설방은 소외되고 감춰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공간이자, 감춰진 사람들의 참여도 허용하는 공간이다.
뮤지컬에서는 여성의 참여로 대표된다. 매설방의 주인으로 달수의 여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춘섬은 여성이다. 달수가 반한 여성 이덕은 매설방에서 다른 소설을 필사하는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직접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매설방에서는 여성의 참여가 허용될 뿐 아니라, 여성이 보다 주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 역시 가능하다.
▲뮤지컬 <판> 공연 사진
아이엠컬처
모두에게 열린 매설방을 위해
뮤지컬 <판>을 보며 오늘날 극장이 매설방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실제로 극장이 그런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여성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주체적인 이야기로 노래되곤 한다. 매일 다변화되는 사회에서 극장은 매설방이 그러했던 것처럼 더 많은 사람에게 열리고, 더 많은 사람의 삶이 이야기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살아가며 만나게 될 사람들이 내게 또 한 권의 책이 되겠지" (넘버 '그런 이야기')
매설방 사람들은 필요한 이야기를 던지고, 그를 통해 단절된 사람들을 이어준다. 위정자의 탄압으로 뮤지컬 <판> 속 인물들도 위기에 봉착하지만, 그 위기를 돌파하는 해법도 결국 이야기다. 보통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는 이야기, 정직하게 전달하는 이야기, 그리고 권력을 향한 과감한 풍자를 마당놀이의 형식으로 전한다.
매설방의 풍자는 비단 19세기 조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17년 초연되어 올해로 어느덧 여섯 번째 시즌을 맞이한 <판>은 시즌마다 당시 사회상에 맞는 풍자를 매섭게 곁들였다. 입이 틀어 막힌 건 매설방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누군가의 입이 권력자에 의해 틀어 막혔으며, 12.3 내란은 폭력을 통해 입을 틀어막으려는 야만적인 시도였다.
뮤지컬 <판>은 매설방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한바탕 마당놀이가 벌어지는 '판'이다. 신명 나는 음악과 통렬한 풍자가 극강의 시너지를 이루는 <판>의 마당은 3월 8일까지 서울 종로구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코튼홀에 열려있다. 문성일·현석준·윤은오('달수' 역), 김지훈·김대곤('호태' 역), 김아영·박은미('춘섬' 역), 박란주·박세미('이덕' 역) 등이 출연한다.
▲뮤지컬 <판> 공연 사진아이엠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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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 '입틀막' 하려는 권력에 '이야기'로 대응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