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연대기> 스틸
판씨네마(주)
리디아는 패착을 거듭하며 살았다. 자신만을 바라보며 헌신하는 이들, 도움과 기회의 손길을 내밀던 이들에게 속마음과는 달리 패악질하고 민폐만 끼친다. 자기 파멸로 스스로를 몰아가는 주인공의 행태는, 아무리 청소년 시절 정서적 학대를 당했다고 해도 면죄부를 얻긴 힘들다. 그녀는 계속 도망치려 했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탈출은 성급한 결혼으로, 마음먹은 바대로 안 되는 실패는 술과 약물에 기대며 외면하려 했다. '가장 안전한 기억은 망각한 자의 기억이다.' 그러나 이는 도망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기억해야 하고, 끄집어내 햇빛을 비춰야 어둠은 사라질 운명이다.
마치 마지막 동아줄이라는 듯, 리디아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기록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작가의 회상처럼, '작은 비극들은 순서대로 정리하기 어렵다.' 기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야기'로 옮겨질 때 현상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형태로 변환하며 비로소 극복 가능한 상태가 된다. 주인공은 다행히 인생의 막장에서 어디선가 내려온 동아줄을 만날 수 있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원작자로 유명한 작가 '켄 키지'의 작가 워크숍이 리디아에게 내려온 구원의 손길이 되었다.
물론 천지개벽처럼 순식간에 밑바닥 패배자가 성공한 작가가 될 순 없다. 스승을 만난 후에도 리디아는 오랜 세월 무명작가, 혹은 지망생에 머문다. 자신의 필력에 좌절하거나 시행착오를 수두룩하게 거친다. 그 세월은 주인공이 가능한 모든 실패를 자초하던 긴 세월과 맞먹을 정도다. 그 기나긴 침잠을 그저 시간 연대기 형식으로만 풀이하면 보는 이가 진이 빠질 지경이다.
감독은 원작의 의외성을 필살기로 활용한다. <물의 연대기>는 전형적 '영웅 신화' 구성, 고귀한 존재가 정해진 시련을 통과의례로 예정된 결말에 도달하는 손쉬운 유혹 대신, 시간 순서를 과감히 부정하며 마치 주인공 머릿속 '의식의 흐름'처럼 순식간에 점프하며 시간을 초월하는 이미지를 선보인다. 과거에 겪은 트라우마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훼방, 이를 필사적으로 뿌리치는 사투가 주인공에게 일생을 건 끝나지 않을 싸움으로 계속된다.
부적응자가 세상에 나가기 두려워 숨기만 한다면 스스로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너무나 간단하지만, 부적응자에겐 위험천만할 수 있다. 그 간단한 진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부적응자의 신화는 강자의 당연한 승리 서사 대신에 초라해도 포기할 수 없는 생존 의지의 승화로 구축된다.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쳐다보기 싫은 과거와 직면해야 한다.
글을 쓴다는 건 개인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자 재구성을 통해 보편화하는 도전이다. 이를 통해 부적응자는 조금 특별한 집단으로, 다시 평범한 이웃으로 자리를 찾는다. 리디아 유크나비치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로, 다시 관객에게 옮겨갈 작은 희망의 불씨는 영화를 통해 세상과 우리를 만나게 하려는, 즉 물에서 땅으로 발돋움하려는 필사의 도전이다.
<작품정보>
물의 연대기
The Chronology of Water
2025 미국, 프랑스, 라트비아 드라마/로맨스/멜로
2026.1. 28. 개봉 128분 청소년 관람불가
감독 크리스틴 스튜어트
출연 이모젠 푸츠, 소라 버치, 톰 스터리지, 짐 벨루시
수입/배급 판씨네마㈜
▲<물의 연대기> 포스터판씨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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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