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연주회 당시 공연
유재영 제공
작품의 제목에 들어간 숫자 '8'은 장식이 아니다. 유재영은 '8'이 황제를 상징하고 길상의 수였다는 기억에서 출발했다. 한국음악 안에서도 8음, 8일무, 8박 장단 등 중요한 숫자로 반복된다는 사실을 다시 발견했다. 그는 그 숫자를 단순한 콘셉트로 쓰는 대신, 구조로 밀어 넣었다. 종묘제례와 굿의 모티브가 자연스럽게 스케치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음악은 하나의 상징이 아니라 작동하는 장치가 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8개의 짧은 음악으로 구성됐다. 겉으로 보면 소품들이 줄지어 서 있는 형태지만, 실제로는 가운데를 기준으로 정확히 접히는 구조다. 첫 소품(즉흥적 도입)을 제외하면 7개의 소품이 4번째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룬다. 말러 교향곡 7번이 3악장을 기준으로 대칭인 데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며, 자신을 "진성 말러리안"이라고 웃었다. 그 웃음 뒤에는, 국악관현악도 구조적으로 더 과감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 숨어 있었다.
"원하는 소품만 따로 들어도 괜찮지만, 작곡가가 의도한 호흡을 느끼려면 약 12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듣길 추천해요. 그러면서 이걸 작곡가 맡김차림으로 이해하면 좋겠어요. 일본어로는 "작곡가 오마카세"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그 순간 작품이 갑자기 가까워집니다. 어렵게 들리기 쉬운 현대음악이 아니라, 작곡가가 내어놓는 한 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면서요."
처음 듣는 사람에게 어디부터 들어보면 좋겠냐고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4번째 소품 '요즘제례악'을 꼽았다. 편종·편경이 담당하던 선율과 리듬을 다른 악기군으로 옮기고, 남창의 영신희문 멜로디를 태평소가 연주하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느낀 제례악의 특징을 관현악법으로 다시 번역해보았단다. 전통을 인용하는 대신, 전통을 해석하는 손길이었다.
'요즘'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는 '요즘'이라는 단어가 어느 순간부터 "요즘 애들이~" 같은 비난의 뉘앙스로 쓰이는 현실이 싫었다. 오히려 요즘을 'Modern'의 의미로 되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메탈 장르와 현대 국악관현악의 결합도 그 실험 중 하나입니다. 다만 '요즘'의 최종 판정은 결국 청중에게 달려 있어요. 청중이 "트렌디하다, 요즘 음악 같다"라고 느낄 때 비로소 '요즘'이 되는 것이죠. 말하자면, '지금'이라는 단어를 혼자 소유하지 않을 거예요."
관객을 위한 '숨겨진 장치'도 공개했다. 메탈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알 법한 드림시어터의 'Metropolis' 루프를 인용해 7번째 소품 '프로그레시브 메탈'에 섞었다. 듣는 사람이 알아채면 웃음이 나는 장난 같은 장치이면서도, 동시에 이 작품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유재영이 더 집요하게 말한 건 의외로 피날레였다. 그는 말러 9번, 베르디 레퀴엠, 차이코프스키 '비창'처럼 곡이 끝난 뒤 30초에서 1분까지 이어지는 콘서트홀의 잔향을 가장 큰 현장감으로 꼽았다. 그 현장감을 공유하고 싶어 자신의 곡 마지막에도 같은 결의 피날레를 넣었다고 했다. '크게 터지며 끝나는' 관습 말고, 국악관현악도 더 다양한 끝맺음을 상상해야 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음악이 끝나고도 남아 있는 공기의 떨림을 청중과 나누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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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아창제 공식 포스터아창제 추진위원단
이번 작품은 연주자들이 협주곡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바쁘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먼저 그들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하지만 곧바로 선정되면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이 연주를 맡는다는 공지를 보고, 120%의 역량을 다해 썼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그의 죄송함은 오히려 책임감으로 번졌고, 그 책임감은 기대감으로 상승했다. 학부·대학원 동료들이 아닌 노련한 악단이 자신의 음악을 처음 만나는 자리를 기대했다. 그 손맛이 더해지면 정말 좋은 연주가 나올 거라고 믿었다. 말은 조심스럽게 했지만, 눈은 확신을 품고 있었다.
요즘 관심사가 무엇이냐고 묻자 지휘를 가장 먼저 꺼냈다. 중학교 합창제 지휘, 고등학교 조회 시간 애국가 지휘까지 그의 지휘사에 대한 열망은 생각보다 길었다. 요즘도 유명 지휘자 내한 공연을 직접 찾아가며 지휘를 본단다. 심지어 한국예술종합학교 관현악 수업을 청강하려고 지휘자에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고, 답이 없자 다시 보내고, 카톡까지 보냈다는 기억은 그의 성격과 고집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끈질기게 연락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셨다는 말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배움을 '현실'로 만들어 왔는지 보여주는 장면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2년의 청강 경험이 관현악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작곡가가 관현악을 쓰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관현악이 작곡가를 다시 만들었다는 느낌이었다.
그가 '아창제'를 별의 순간이라고 부른 뒤의 계획도 구체적이었다. 학부를 조기졸업하고, 독일에서 작곡을 더 깊게 배우기 위해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독일어는 이미 B2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도 했다. 먼 이야기처럼 들릴 법한 계획이 이상하게 현실적으로 들린 건, 그가 늘 '비어 있는 칸'을 찾아 들어가던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가장 큰 목표는 스승들처럼 아창제와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며 작품을 발표하는 것, 더 멀리 가서는 3회 당선되어 위촉 작품도 발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장기 목표를 말할 때도 과장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분명한 그림을 꺼내 보였다. '지금 여기'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방식이, 늘 그랬듯 구체적이었다. 필자와 나눈 인터뷰 말미에 그가 관객에게 남긴 문장은 간단했다.
"지휘자의 지휘봉이 내려갈 때까지의 현장감, 그러니까 콘서트홀의 잔향을 느껴주시면 좋겠습니다."
끝난 뒤에야 비로소 들리는 것들. 소리가 사라지고도 남는 것들. 유재영이 말하는 '요즘'은 어쩌면 그 잔향의 시간과 닮아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붙잡되, 그 순간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 무언가를 끝까지 믿는 태도. 그 태도가 국악관현악의 다음 장을 조금 더 넓혀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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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쓰고 있다. 문화예술 시사 월간지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에서 객원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만나고 있다. 현재는 '서울문화투데이' '더프리뷰' 등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