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토토로의 한 장면
스튜디오 지브리
삼십 대 후반이 되어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 토토로보다 사츠키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동생을 챙기고, 어른의 역할을 대신하려 애쓰는 아이. 사츠키는 혼란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영화는 그 책임감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츠키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더욱 중요하다.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오늘의 어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괜찮은 척'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늘 답을 요구한다. 불안을 느끼면 이유를 찾고,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탓한다. "난 왜 이것밖에 못 하지"라는 질문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웃집 토토로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의 방향을 조금 바꾼다. '이것밖에 못 하는 나'가 아니라 '지금은 이만큼 할 수 있는 나'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든다. 능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쓰이지 않을 뿐이라는 관점, 이 영화는 그 생각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다.
토토로는 늘 떠난다. 필요할 때 나타났다가, 다시 숲으로 돌아간다. 고양이버스 역시 마찬가지다. 급한 순간 아이들을 데려다주고는 아무 설명 없이 사라진다. 도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부담이 없다. 누군가의 삶을 바꿔놓겠다고 선언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도와줄 뿐이다. 우리는 삶에서 위기의 순간을 함께 지나온 존재를 오래 기억한다. 토토로는 그런 기억으로 남는 존재다.
이 영화가 지금 다시 필요해진 이유는 분명하다.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더 많아졌고, 삶의 속도는 더 빨라졌다. 우리는 여전히 성과를 요구받는 사회 속에 있다. 그럴수록 토토로 같은 태도가 더욱 귀해진다. 문제를 고치려 들지 않고, 섣불리 위로하지 않으며, 그저 옆에 서 있는 존재. 이 태도는 관계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물론 현실은 토토로처럼 다정하지 않다.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답은 끝내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웃집 토토로는 답이 오기 전까지의 시간 역시 삶이라고 말한다. 그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반드시 유능함일 필요는 없다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도 하루를 견뎌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끝은 화려하지 않다. 큰 성취도, 극적인 변화도 없다. 대신 기억 속에 스며든다. 비 오는 날의 풍경, 숲의 깊이, 아이들의 웃음 같은 것들로. 관객은 엔딩을 맞으며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종료 버튼을 누른다. 불안한 시간을 견디는 또 하나의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토토로일지도 모른다. 해결책이 아닌 동행과 조언이 아닌 함께하는 시간. 그것이 사람이든, 기억이든, 영화든 중요한 것은 명확한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에게 그 자리를 허락하는 일이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견뎌낸 자신에게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해" 라고 말해보는 것. 토토로는 늘 그렇게, 말없이 우리 마음 속에 서 있다.
▲이웃집 토토로의 한 장면스튜디오 지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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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지나가는 인물과 장소, 고단한 날들에서 흘러나온 진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사소해 보이는 순간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닿아 위로가 되길 바라며,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