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출산으로 경력단절, 26년 만에 돌아온 명창의 사연

[김성호의 씨네만세 1251] <수궁>

국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보며 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이 맞은 운명이 너무나도 비슷해서다.

'황금빛 들녘'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감정이 드는가. 십중팔구 수확을 앞둔 논의 풍경, 풍요롭고 평화로운 농촌의 정서일 테다. 그러나 나는 그에 앞서 다른 감상과 마주한다. 일제강점기의 압제와 독재의 폭거, 이들이 앗아간 아까운 것들을 떠올린다.

한때 한반도 들판은 오색빛깔 다채롭게 빛났다. 까투리찰의 청록빛과 이름처럼 하얀 흰배, 조동지의 노란색, 북흑조의 검은 빛도 있었다. 수확철이 되면 저마다의 색으로 흔들리는 논의 풍경이 장관이었을 테다. 그리하여 각 고을 수령들이 발령을 받고 나아갈 때 제가 거할 곳의 쌀과 술의 맛을 궁금해 하였던 일이다. 하나 같이 황금빛 들녘인 오늘의 논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이다.

수궁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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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쌀이 사라졌듯 우리 소리도 사라지지만

일제강점기 이전 한반도엔 모두 1451종에 달하는 쌀 품종이 있었다고 전한다. 35년 뒤 한반도에 남은 건 그 절반도 되지 못했다. 오늘날 한반도에 토종 쌀 품종은 451종이 남아 있다. 우리 들판이 아니라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유전자원센터에 종자로 보관돼 있다. 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한 뒤 저들의 개량쌀을 우리 논에 심도록 했다. 쌀은 곧 군비가 되었으니, 기준은 오로지 생산량일 뿐이었다. 의식 있는 농부들이 각자 토종쌀 종자를 보관하지 않았다면 우리 전통의 토종쌀은 아예 씨가 말랐을 것이다.

유수연 감독의 다큐멘터리 <수궁>은 토종쌀이 지나온 길을 떠오르게 한다. 다큐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인 정의진을 주인공 삼아 한국 국악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본다. 정의진은 동편제 <수궁가>의 전승자다. 한때 남도 판소리를 양분했던 두 유파 중 서편제는 대단한 명성을 얻고 소리의 표준으로 자리했으나 동편제는 잊힌 지 오래다. 그마저도 소리가 설 자리를 급속히 잃어가는 오늘에 이르러 동편제건 서편제건 젊은 전승자를 찾기 어려운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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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간 소리 떠났던 명창의 복귀

영화는 결혼과 출산 이후 26년 간 예악을 등졌던 정의진 명창의 지난 시간을 살핀다. 당대의 명창으로 이름 높았던 정창업의 증손녀이자 동편제와 서편제를 두루 익힌 정광수의 딸로, 고교 시절인 17살부터 소리 공부를 한 예인으로 살았다. 옛 기억에 더하여 아버지가 남긴 판소리 테이프로 공부한 그녀의 소리는 오늘날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변질된 주류 소리와는 다른 특색을 자랑한다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건 소리가 겪어온 고단한 시간들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엔 무당이며 광대들이나 하는 잡기로, 일제강점기엔 기생이나 하는 천한 일로 여겨져 온 소리다. 그리하여 소리 하는 이들조차 그를 떳떳하게 대하지 못한 시간이 길었다. 집안 대대로 소리를 해온 정의진 명창조차도 소리 하는 일이 다른 문제를 일으킬까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처음 소리를 배울 땐 제 이름을 거짓으로 둘러대기도 했다. 소리를 대하는 편견이 엄연히 존재했고, 저 스스로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때문이었다.

소리가 전통문화로 보존해야 할 것처럼 여겨진 해방 뒤 세상에서도 편견은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당대 소리꾼이던 정의진 명창이 결혼 후 가정에 충실하며 경력단절을 겪었던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영화 가운데 여전히 제가 소리를 한다는 걸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이 여럿 등장한단 점도 인상적이다. 제 정면 모습은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감독에게 당부하는 이유가 시어머니며 다른 이들의 눈치가 보이는 때문이라는 것. 여전히 소리를 하는 걸 탐탁찮게 생각하는 시선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를 지켜야 할 우리 전통 문화라고 하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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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지 못한 것인가, 뒤떨어진 것일까

소리가 맞이한 초라한 현실은 그저 일제강점기와 우리 문화를 장려하지 못한 독재정권의 잘못만이 아니다. 대중들이 더는 소리를 소비하지 않는 때문이기도 하다. 그저 소비하지 않는 것만은 아닐 테다. 기억하지 않고 돌아보지 않으며 여전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그를 대하는 때문이겠다. 낡은 것, 지루한 것으로 소리를 바라보는 자세가 소리를 정말 그러한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무대에 서는 이들이 대부분 고령의 노인들이란 것, 더는 젊고 유망한 이들이 뛰어들지 않는 듯 보이는 것이 우리의 무관심이며 무지와 관련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

토종쌀이 맞은 운명을 쉽게 맛이 떨어져서, 생산량이 부족해서라 보는 시각은 어리석고 폭력적이다. 그 안에는 토종쌀이 감내한 가혹한 운명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토종쌀을 소중히 여겼다면, 그를 발전케 할 기회를 줄 수 있는 힘과 지성, 그리고 의지가 있었다면 그 운명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소리의 운명 또한 그와 같지 않았을까.

<수궁>은 끝내 지켜지지 못한 채 스러져 가는 옛 것에 대한 책임을 일깨운다. 그 초라한 운명이 그저 그 자신의 경쟁력 없음 때문이 아니란 것을 내보인다. 한때는 젊고 재주 있는 이들이 소리를 하던 때가 있었다. 그저 험한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함이었겠으나 그 본연의 매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장인처럼 제 길을 닦고 발전시킨 이들이 명창으로 거듭나 그를 아끼는 이들의 선택을 받았다.

일본은 전통을 존중하는데 한국은 어째서?

그러나 오늘 소리는 더는 그만한 존중을 받지 못한다.

일본의 대응할 만한 문화, 가부키며 게이샤 같은 업종조차 상당한 존중을 받으며 꾸준히 그를 전승할 후계가 탄생하는 모습과 대비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둘의 차이가 그저 소리의 경쟁력에 있다고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 밥상에서, 우리 무대에서 우리의 것을 잃어간다. 그 자리를 다른 무엇이 빠르게 채우겠으나, 어쩌면 복구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우리가 잃은 것이 그렇게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고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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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