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불세출의 저술 <자유론>을 통해 인간사회가 더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 원칙을 설명한다. 하나는 자유의 필요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자유의 제한을 이야기한다. 인간사회를 더 낫게 하려고 필요한 자유의 보장과 그 한계를 말하는 것이 <자유론>의 핵심이다.
<자유론> 두 번째 원칙은 이렇다. 서로 다른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개인의 절대적 자유란 이상에 불과하다. 제 자유라며 타인의 집에 들어가 그 자식을 노예 삼고 아내며 남편을 탐한다면 그를 어떻게 허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과적으로 사회는 구성원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내 자유는 타인의 피해 앞에서 멈춘다는 것, 그것이 밀의 두 번째 원칙이 된다. 요컨대 <자유론>의 두 번째 원칙은 자유를 제한할 근거를 말한다. 가장 큰 범위의 자유를 허용하면서도 결코 넘어선 안 될 선을 제시한 게 이 저술의 탁월함이다.
다큐멘터리 <청와대 건너 붉은 벽돌집>은 지난 시대 사상가 밀의 골머리를 썩게 할 작품이다. 딜레마를 즐긴 지난 시대 탁월한 사상가인 그라도 딱 잘라 이래야만 한다고 말할 수 없게 하는 난제를 던지는 것.
▲청와대 건너 붉은 벽돌집스틸컷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청와대와 1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집
안소연 감독의 72분짜리 장편 다큐는 이 시대 한국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다룬다. 배경이 되는 건 제목에서 드러나듯 '청와대 건너 붉은 벽돌집', 바로 안소연 감독이 나고 자란 제 집이다. 오빠와 언니는 결혼해 출가하고 막내딸인 감독이 조부모와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바로 이 집을 이야기하는데 청와대를 빼놓을 수 없단 게 바로 이 영화의 요점이 된다. 직선거리로 1km가 채 되지 않는 곳에 그 푸른 지붕이 보이는 집은 영 난감한 문제를 안고 있다. 바로 소음.
한국은 지난 십수 년간 정치적 대격변을 겪어냈다. 두 명의 대통령이 탄핵당했고 세 명의 대통령이 구속됐다. 그동안 첨예하게 갈린 정치 구도는 서로가 다른 쪽을 향하여 결코 수용될 리 없는 주장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누군가는 감옥에 갇힌 대통령을 내놓으라 하고, 또 누구는 지금의 대통령이 내려와야 한다고 했다. 개중 어느 쪽에 정당성이 있느냐를 따지는 건 이 영화의 관심이 아니다. 그러니까 끝이 보이지 않는 집회를 왜 확성기를 들고 서 제 집 앞에서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연일 열리는 광화문 광장에서의 집회는 일대 주민들에게 도저히 견디기 힘든 피해를 줬다. 소음도 소음이거니와 집 앞까지 와야 할 대중교통 노선이 우회하도록 만들어 먼 거리를 돌아가도록 했다. 하루이틀이면 끝날 거란 기대가 이제는 들지도 않는다. 첨예한 주장이 반복된다는 얘기는 둘 중 한쪽의 주장에 찬동한대도 다른 쪽의 주장엔 공감할 수 없다는 게 아닌가. 꼴 보기 싫은 얘기를 내 집 안방에서 연중 내내 들어야 한다면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층간소음에도 살인이 난다는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청와대 건너 붉은 벽돌집스틸컷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청와대와 이웃하고 산다는 것
"그럼 집을 팔고 이사를 가"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람 사는 사정이란 그렇게 딱 잘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감독의 조부모가 처음 이곳에 터 잡은 이래 50년이 흘렀다고 했다. 그동안 청와대의 주인은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노태우에서 김영삼으로, 김대중과 노무현을 거쳐 이명박과 박근혜, 그리고 문재인으로 이어졌다. 윤석열이 집을 나가 용산에 터를 잡았으나 그 결과가 어찌 됐는지는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다. 이재명 현 대통령이 청와대로 다시 귀환했으니 이 집도, 이 집에 사는 가족들도 지난 50년 최고 권력자의 이웃으로 살았다.
영화는 이 집이 겪어낸 지난 시간을 감독의 조부모와 부모의 인터뷰를 통해 관객 앞에 풀어낸다. 최고 권력자의 이웃이란 게 결코 좋지만은 않다. 청와대가 장을 봤던 시장에서 나도 장을 봤다는 이야기, 또 전두환 시절 집 앞에 초소가 생기며 도둑이 얼씬도 못 했다는 얘기 정도가 영화에 등장한 좋은 이야기의 전부가 아닐까 싶을 만큼. 좋은 게 그저 그뿐 만은 아니었을 테지만, 영화는 그보다는 나쁜 것들을 주로 풀어놓는다.
전두환 시절엔 어찌나 엄혹했는지. 비가 줄줄 새는 집을 수리라도 할라치면 당장에 사람이 와서 그만두게 엄포를 놓았더란다. 제 집도 마음대로 고치지 못하고 담장 바로 앞에 경비초소가 섰으니 얼마나 살기가 팍팍했을까. 차도 마음대로 오가지 못해서 먼 길을 걸어 돌아와야 할 때도 있었다고. 마침내 민주화가 되고 좋은 세상이 온 듯싶었던 것도 잠깐, 광화문으로 몰려든 이들의 시위가 연일 지속되며 소음과 대중교통 우회로 살기 불편해진 때가 도래한 것이다.
조부모는 평생을 살아온 집을 팔고 나갈 생각이 없고, 부모님도 제 대에는 모시고 같이 살아야지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 말한다. 그 앞에서 부모 곁에 딱 붙어사는 막내딸은 이 모든 불편을 차라리 카메라 안에 담아내 작품으로 만들어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이야기다. 처음엔 고발이었다는 영화는 차츰 가족의 일상을 담아낸 사적다큐와의 경계를 오가다가 마침내는 그 어디쯤에 머문다. <청와대 건너 붉은 벽돌집>은 그렇게 고발과 사적다큐 사이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얼마간 훑어나가는 이야기가 된다.
▲청와대 건너 붉은 벽돌집스틸컷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그들의 자유가 우리집 안방까지 들어올 때
앞서 <자유론>의 두 번째 원칙은 타인에게 피해를 일으키는 자유는 보장돼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그대로 한국 법치주의의 원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예외가 있으니, 그보다 앞서 보장돼야 할 중한 권리와 충돌할 때다.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결사의 자유가 평온한 일상을 누릴 권리와 충돌하는 영화 속 상황이 꼭 그렇다. 한국 법원은 원칙적으로 소음과 통행방해 등 지역 주민과 통행인의 불편을 수반하는 집회를 우선해 보장한다. 대신 소음기준 등을 정해 불필요한 소음은 규제하도록 한다. 그러나 소음기준 이하라 해도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다. 또 그 기준이 충실히 지켜지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누군가는 불편해야만 한다. 거의 모든 경우 주민들이 그 불편을 감내해왔다.
영화 속 감독 안소연이 불편을 호소하고, 짜증을 내는 장면이 여럿이다. 본래 감정표현이 풍부한 편인 듯, 감독 스스로가 영화 전면에 등장해 비교적 담담한 가족들과 달리 가장 격하게 분노를 표하고 부아를 낸다. 지난 정권이 용산으로 옮겨간 뒤 좀 잦아들까 했으나 청와대서 콘서트가 열릴 때는 직접 카메라를 켜고 한숨을 몰아쉬는 제 모습을 담아내기도 한다. 그녀가 느끼는 불만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청와대 건너 붉은 벽돌집>은 한국 현대사가 걸어온 길을 좀 다른 각도에서 돌아보도록 한다. 이토록 괴로운 소음을 참아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무언지를 그래도 생각하게끔 이끈다. <자유론> 한 권 책 안에 담긴 고뇌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그와 같은 갈등이 현실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하게 한다.
▲청와대 건너 붉은 벽돌집포스터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독특한 시각과 답답한 판단들
다만 아쉬운 구석이 상당하다. 장편 다큐임에도 명확한 초점 없이 러닝타임을 소진하는 대목이 무엇보다 그렇다. 분명한 문제를 겨냥하고 있음에도 카메라를 들고 문제의 근원으로, 이를테면 집회현장이나 그를 허용하는 관계단체, 법원 등으로 전혀 나아가지 않는다. 그저 집 안에 머물러 가족의 얼굴을 찍고 창밖을 바라볼 뿐이다. 길게 이어지는 가족들의 인터뷰와 그들이 소일하는 모습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가족의 일상과 생각을 담은 홈비디오와 청와대 근처 사는 주민의 불편을 담은 브이로그 사이에서 의식 있는 다큐의 지점을 얼마 확보하지 못한다.
핵심이 되는 소음을 구체적으로 측정한다거나 관객 앞에 그 불편을 충실히 전달하려는 시도 또한 전무하다. 그리하여 관객은 소음을 느끼는 화면 속 인물들의 말과 태도로 불편을 짐작할 뿐, 직접 소음의 고통을 체감하지 못한다. 충분히 가능했을 작업을 아예 하지 않음으로써 영화가 담은 감각의 폭이 좁아졌다.
감독은 수시로 전면에 등장하고 제 감성이나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냄에도 뚜렷하게 어떤 역할을 하지 않는다. 도리어 등장하는 다른 가족은 대체로 담담하고 수용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반면, 감독 자신이 가장 튀고 극적인 반응이라 관객이 영화가 평균적이며 합당한 주장을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감독 스스로를 전면에 내세워 감정을 보이기 보다는 보다 사려 깊게 실재하는 불편을 전하기 위한 마땅한 장치들을 고심해야 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붉은 벽돌집'이 화면에 거의 담기지 않는단 점도 아쉽다. 전반적으로 신마다 촬영분의 미학적 기복이 매우 크기도 하거니와, 집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함에도 그 외관을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고민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 이 같은 고려가 있었다면 작품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영화가 되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건너 붉은 벽돌집>은 유의미한 지점을 밟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지나온 역사, 여전히 풀지 못하고 더욱 심해지기까지 하는 갈등, 소란은 커지지만 소통은 되지 않는 현실까지를 알도록 한다.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감내하도록 하는 고통은 과연 마땅한 것인지도 살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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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