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죽인 열여섯 소년, 한 시간의 토론이 바꾼 결과

[김성호의 씨네만세 1250] 수원시 시민배심법정과 < 12인의 성난 사람들 >

지난해 말 수원특례시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다녀왔다. 영화 한 편을 보고 이야기를 전해달라는 청탁이었다. 작품은 70년 전 나온 < 12인의 성난 사람들 >. 수원시가 이어온 시민배심법정 제도를 알리고 참여를 이끌기 위한 행사라 했다.

이날 내가 전한 이야기를 이번 '씨네만세'에 되짚어 다루려 한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와 그날의 평론이 우리 시대에 유효하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70년이 된 옛 영화다. 흑백화면에다 연출기법도 투박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다. 미국 형사법정 12명의 배심원 중 여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흑인을 비롯해 소수자라 할 수 있는 이 또한 없으니 그 구성이 시대착오적이다. 하다못해 밀실에서 공공연히 담배를 태우는 꼴은 오늘 날의 상식과 도덕에 비추어 영 뒤떨어져 있다 하겠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아직도 할리우드를 넘어 영화사 전체의 고전으로 꼽힌다. 그저 고전일 뿐 아니라 법정영화를 논할 때마다 둘째 손가락으로 밀리는 경우가 거의 없는 독보적 걸작이다. 훗날 걸출한 작품을 여럿 내놓은 명감독 시드니 루멧의 필모그래피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전설적 데뷔작이다. 그건 이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엄혹한 비평가인 세월을 극복할 무기를 가진 덕분이다. 이 영화는 2026년 오늘까지도, 미국은 물론이고 태평양 건너 한국에서까지도 탁월하고 유효하다. 지금부터 나는 그 이유를 전하려 한다.

12인의 성난 사람들 스틸컷
12인의 성난 사람들스틸컷컬럼비아 픽쳐스

이 영화는 어째서 고전명작으로 남았나

영화 소개부터 해보겠다. 상술했듯 < 12인의 성난 사람들 >은 미국 법정영화 첫 손가락에 꼽히는 명작이다. 그런데 요상하다. 법정 하면 떠올리는 것들, 이를테면 판사와 검사, 변호사가 영화 속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신 아주 잠깐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러닝타임이 밀실에 가까운 법원 배심원실에서, 12명 배심원들만 나오는 채 진행된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없는 이 영화가 어째서 최고의 법정영화인지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 12인의 성난 사람들 >을 이해하는 일과 닿아 있다.

영화는 한국으로 치면 존속살해, 열여섯 소년이 제 아버지를 죽인 1급살인 혐의로 기소된 사건을 다룬다. 미국 1급살인 법규에 따라 유죄가 확정되면 소년에겐 곧장 사형이 언도될 참이다. 미국 형사재판은 재판진행과 양형은 판사에게 맡기되 유무죄 판단은 배심원이 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것도 12명 배심원이 만장일치로 결정해야 한다. 영화는 배심원단이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놓기까지의 이야기다. 요컨대 소년이 살고 죽는 일이 이 자리에서 결정된다.

1번부터 12번까지 번호로 불리는 배심원들은 각자 투표로 유무죄 여부를 가린다. 만장일치 유죄판결로 금세 끝날 줄 알았던 배심원단의 논의는 몇 시간 째 지속된다. 첫 투표에서 한 명이 무죄를 말하고, 다음엔 다른 한 명이 그와 뜻을 같이한다. 투표가 이어질 때마다 한두 명씩 유죄에서 무죄로 입장을 바꾼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무죄로 표결한다. 영화는 검찰이 기소하며 제시한 증거와 검찰 측 증인들의 증언이 하나하나 파훼되는 과정을 보인다. 조금씩, 마침내 공고했던 유무죄의 판도가 뒤집어지는 과정이 이 영화의 중심 줄기를 이룬다.

주인공은 8번 배심원(헨리 폰다 분)이다. 그는 열 두 배심원 가운데서 유일하게 첫 투표에서 무죄에 표를 던진다.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생명이 오가는 결정을 단 한 번 논의 없이 내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경찰수사를 바탕으로 기소한 검찰 의견에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약간의 의문 또한 자리한다. 그가 던지는 건 의문이다. 마땅한 의문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 스틸컷
12인의 성난 사람들스틸컷컬럼비아 픽쳐스

영웅적인, 그러나 이례적인

8번 배심원은 미국 영화 역사상 손꼽히는 영웅적 캐릭터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 평론가며 관객 대상으로 이뤄진 각종 조사에서 자주 언급되곤 한다. 나는 그의 특성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그는 제가 하는 일이 무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제 결정으로 누군가 죽을 수 있다는 것, 1급살인 재판 배심원의 역할과 무게를 오로지 그만이 이해하고 있다. 둘째로, 그는 탁월한 지성인이다. 합리적 의심과 판단으로 검찰의 기소가 불충분하게 이뤄졌고 국선 변호인의 변호 또한 허술했단 걸 어렴풋이나마 파악한다. 마지막 셋째, 8번 배심원은 용기가 있다. 저와 입장이 다른 11명, 개중에선 강한 목소리로 다른 의견을 허용치 않으려는 이들까지 있다. 8번 배심원은 기죽지 않고 그들 사이에서 제 의지를 관철한다. 단 한 번의 논의는 있어야만 한다며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다.

8번 배심원은 그래서 영웅이다. 그와 같은 영웅은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곳보다 없는 곳이 많다. 영웅적이란 말이 이례적이란 말과 닿아 있는 이유다. 그래서 중요한 건 다른 11명이 된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진정으로 관객 앞에 내보이고자 하는 건 8번 배심원이 아니라 다른 11명의 평범한 배심원이다. 그들이 사회를 이루고, 투표하며, 결정하는 대중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영화를 보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진실을 알지 못한다. 가끔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조차 알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가 8번 배심원이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떻게 좋은 결정을 해낼 수 있을까?

이들 배심원을 몇 부류로 나눌 수 있겠다. 8번 배심원은 극심한 반발 속에서 스스로 다음 투표에서 빠지겠다 말한다. 모두가 유죄라 말한다면 자신 또한 의견을 같이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진행된 두 번째 투표에서 다시 한 표, 반대표가 나온다. 11명 중 가장 먼저 반대표를 행사한 건 옆자리 9번 배심원이다. 나이가 지긋한 9번 배심원은 어째서 의견을 바꿨나. 그가 검찰의 기소의견을 파훼할 대단한 증거를 발견해 입장을 바꾼 게 아니란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모두 앞에서 홀로 다른 의견을 진중하게 제시하는 8번 배심원의 뚝심에, 진지함에, 말하자면 태도에 마음을 돌린다. 더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고, 사건을 더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남은 10명의 배심원이 모두 유죄의견을 무죄의견으로 바꾸기까지는 9번 배심원과 같은 이유로 마음을 돌린 이들이 제법 된다. 요컨대 이성적 판단이 아닌 태도와 자세에 감화돼 마음을 돌리는 이들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 스틸컷
12인의 성난 사람들스틸컷컬럼비아 픽쳐스

왜 9번 배심원인가

어째서 9번 배심원인가.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훌륭함 중 하나라 여긴다. 인간은 오로지 지성과 이성으로 살지 않는다. 감성의 영향 또한 받는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국가며 사회에서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수많은 논의와 토의가 필연적이다. 서로 생각이 다른 이에게 다가서서 그 마음을 돌리고 결정을 바꿔야 한다. 그것이 오로지 지성과 이성에만 좌우되지 않는다는 자명한 진실을 우리는 자주 잊지는 않는가.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보다 공론의 장에 성숙하게 임하는 자세가 더 중요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새로 드러난 사실에 따라서 입장을 바꾸는 이들도 많다. 합리적인 이들이다. 그중에서도 누가 보아도 탁월한 지성을 가진 4번 배심원이 거의 마지막까지 제 주장을 견지한다는 사실은 유달리 인상적이다. 그는 제 논거가 파훼되자마자 바로 입장을 바꾸긴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다른 배심원 대부분이 무죄로 넘어온 뒤였다. 요컨대 지성이 진실에 가장 가깝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로지 앞의 두 부류가 전부가 아니다. 또 한 부류는 그저 대세를 추종하는 이들이다. 이성도, 지성도, 심지어 태도에도 움직이지 않던 이들이 대세가 넘어가자 순식간에 입장을 바꾼다. 현실 정치와 역사를 충실히 반영해 쓰인 극은 이들의 존재를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 인류문명이 걸어온 길, 그리고 현실이 그러하니까.

마지막으로 모든 진실이 드러나도 입장을 바꾸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다. 제 아집과 고정관념, 편견으로 똘똘뭉쳐 온 세상을 재단하는 불합리한 자들. 때로는 누군가의 목숨이 제 손에 달렸을 때조차 그들은 오로지 제 기분으로 마구 판단하려 든다. 사회를 위하여 이들은 굴복시키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걸까. 적어도 영화는 그렇게 한다.

12인의 성난 사람들 포스터
12인의 성난 사람들포스터컬럼비아 픽쳐스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바꾸어냈다

설득이든 굴복이든 간에 11명의 배심원은 유죄에서 무죄로 모두 돌아선다. 그리하여 소년은 죽을 위기에서 살아날 기회를 맞는다. 죄인 열을 놓아주더라도 무고한 사람 하나를 억울하게 해선 안 된다는 법언이 비로소 제 의미를 발한다.

영화의 끝은 8번과 9번 배심원이 법정 바깥에서 만나는 신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법정 안, 그중에서도 방 한 칸에서 보낸 영화가 구태여 바깥 신을 하나 찍어 붙였다. 그 허무하고 밋밋한 헤어짐을 말이다. 그건 11명 배심원, 곧 우리의 숙명이다. 이 대단한 시간을 보낸 뒤 11명의 배심원은 달라졌을까.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이들이 또 다른 사건의 배심원으로 결정돼 일을 처리하게 된다면 전과는 다른 태도로 다른 결론을 이끌어낼까. 물론 아니다. 변화는 건 없다. 변화가 이뤄진다면 그는 기적, 마치 8번 배심원의 존재처럼 지극히 이례적으로만 일어날 테다. 영화의 허망한 마지막 신은 바로 그 사실을 짚어준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배심원 토론이 열리기 전과 열린 뒤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결론은 바뀌었다. 8번 배심원의 강변으로 주어진 '딱 한 시간'의 토론이 결과를 바꿔냈다. 죽을 이를 살려냈다. 정의를 이뤄냈다. 혹자는 8번 배심원의 존재에서 차이를 찾으려 들지만 그보다 앞서 있었던 것을 무시해선 안 된다. 배심원제다. 만장일치의 배심원제가 8번 배심원에게 기회를 허했다. 8번 배심원은 그 기회를 살렸을 뿐이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공론장, 제도, 만장일치의 배심원제인 이유다.

씨네토크 지난해 말 수원시 미디어센터에서 열린 '영화로 만나는 시민배심법정' 행사 사진.
씨네토크지난해 말 수원시 미디어센터에서 열린 '영화로 만나는 시민배심법정' 행사 사진.수원시

진짜 주인공은 제도, 그 제도의 주인은 시민

할리우드 사상 최고의 법정영화엔 판사와 검사, 변호사의 활약이 없다. 그들은 모두 실패했다. 경찰의 수사도, 검찰의 기소도 부적절하고 부실했다. 판사의 재판진행 또한 엉망이었다. 변호사는 무력하고 무능했다. 법의 실패가 될 뻔한 걸 살려낸 건 배심원제란 제도다. 그 제도가 보장하는 공론의 장이 11명의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전과 다른 결정을 하도록 했다. 영화는 제도가 결론을 바꿔낼 수 있음을 말한다. 공론장이 결과를 바꿀 수 있다. 무너진 정의를 세울 수 있다. 이 영화가 최고의 법정영화로 꼽히는 데는 법원과 검찰, 법조 전문가의 실패를 바로잡는 시민들의 깨어 있는 정신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입헌공화정에선 법의 주인조차 시민인 것이다.

6년 전 미국 연방 대법원은 미국 모든 주 형사법정에서 만장일치의 배심원제를 강제하는 걸 합헌으로 다시금 결정했다. 이 제도에 따르는 비효율 등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가 위와 같은 것일 테다. 배심원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는 한국의 관객들조차 이 사실만큼은 마땅히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법과 제도는 언제나 실패할 수 있기에 그러하고, 성숙한 공론장이 미숙한 시민조차 나은 결론으로 이끌 수 있기에 그러하다.

수원시가 시민 스스로 시정에 더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시민배심원제를 운영하는 것도, 이토록 훌륭한 작품으로 시네토크 자리를 따로 마련한 것도 같은 이유일 테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수원 시민배심원제 12인의성난사람들 시드니루멧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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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