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꿈 없이 뛰어놀던 삼총사를 변하게 만든 '이날' 벌어진 일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굿 포 낫씽>

순백의 눈으로 뒤덮힌 홋카이도 삿포로, 겨울방학을 맞이한 18살 세 친구 '테츠오', '이와미', '타니'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상태다. 딱히 진로도 결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셋은 선배가 일하는 보안 경비 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난생처음 어설픈 이력서도 작성하고, 그냥 아르바이트가 아니라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지만, 직원이라곤 사장 포함 3명이던 작은 회사에서 그들이 맡은 건 선배 직원의 허드렛일을 돕는 조수 노릇이 고작이다. 그래도 뭔가 어른의 길에 들어선 기분에 우쭐댄다.

아침마다 회사 앞마당 눈을 치우는 게 하루의 시작이지만, 세 친구는 그저 처음 경험하는 직장이 신기하기만 하다. 선배 조언을 그대로 따르듯, 그들은 평소처럼 수다를 떨고 장난도 치다 종종 혼쭐이 나긴 해도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선배 직원들과 말도 붙여보고, 회식 자리도 낀다. 선배에게 운전도 배우고, 슬슬 고급 기술 업무도 알려 달라 보채다 핀잔도 먹으며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그렇게 모험과도 같은 나날이 무한히 이어질 것만 같던 어느 날, 사건이 발생하며 모든 게 꼬이기 시작한다.

발견하는 기쁨

 <굿 포 낫씽> 스틸
<굿 포 낫씽> 스틸㈜디오시네마

'거장'의 첫 출발점은 어땠을까라는 질문은 늘 호기심 천국이 된다. 물론 진화를 거듭해 현재에 이른 작가의 시작이 전성기의 역작들에 비해 당연히 작품 자체 완성도만 놓고 보면 미흡한 게 당연할 테지만, 수많은 감독 중에도 '작가'라 불리는 소수의 창작자, 관객이 이 감독의 작품이라면 기대하고 신뢰하는 특정한 색깔과 지향을 수립한 이들의 데뷔작에는 현재 그들이 구축한 작품 세계의 떡잎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첫 번째 영화'는 미래를 거슬러 예측하는 발견의 기쁨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기능한다.

지금도 한창 극장에서 성황리에 독립예술영화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신작 <여행과 나날>을 연출한 미야케 쇼의 첫 장편영화 <굿 포 낫씽>이 14년 만에 국내에 늦깎이 개봉을 앞둔 상태다. 감독의 후속작들이 유수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으며 작가의 명함을 풍성하게 만들었다면, 해당 작품은 출발점이란 것 외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이 작품이 개봉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감독의 현재 유명세에 편승한 기획 아닌지 살짝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었다. 어쨌건 궁금한 건 참을 수 없기에 요즘 잘 나가는 감독의 기원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국내에 감독의 이름을 알린 2018년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2022년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2024년 <새벽의 모든>까지 베를린국제영화제 3연속 진출 이력, 3대 영화제 경쟁 진출 교두보로 꼽히는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표범상에 빛나는 <여행과 나날>까지 자타공인 감독의 대표작들과 비교하면 <굿 포 낫씽>은 얼핏 거칠게 성기는 만듦새로 여겨질 법하다. 하지만 이 작품엔 이후 그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방향과 색채가 형성되는 과정이 녹아들어 있다.

그런 측면으로 보자면, 2019년 공개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경계에 선 최소 규모 작업 <와일드 투어>와 함께 미야케 쇼라는 작가의 저력과 개성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작업으로 기능한다. 빛나는 명성의 대표작들을 일단 훑어봤다면, 미야케 쇼의 작가적 인장을 한 번 더 거슬러 확인하는 계기로 두 작품은 반드시 거쳐야 할 정거장이 될 테다.

따스한 시선의 관찰자

 <굿 포 낫씽> 스틸
<굿 포 낫씽> 스틸㈜디오시네마

<굿 포 낫씽>은 흑백 화면으로 촬영한, 장편으로선 단출한 70여 분으로 완성한 담백한 소품이다. 마치 주인공들의 겨울철 일상을 작품 속 이야기처럼 딱 한 달 뒤따르며 기록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모르고 보면 다큐멘터리처럼 여겨질 법하다. 기교나 실험보다는 그저 인물들이 겪는 특별한 순간을 충실하게 그리는 데 가깝다. 이렇게 들으면 대수롭지 않아 뵈지만, 훗날 감독의 작업을 떠올릴 때 우선 언급하는 요소들이 수면 아래 잠복하고 있음을 곧 깨닫고 만다.

세 주인공은 성인이 되는 길목에 섰지만, 미래에 관한 치밀한 계획도, 주변의 기대도 달리 갖지 못한 상태다. 온전히 사회의 중력에서 유예된 채 부유하는 처지다. 그저 단짝들끼리 어울려 왁자지껄 쏘다니는 게 일상이다. 그런 그들에게 우연히 도착한 기회는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경사로인 셈이다. 두근거리는 기대감으로 조그만 회사에 출근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특별한 일은 생기지 않는다. 보조 업무로 심부름만 할 뿐일지언정, 뭐든 낯설고 신기하다. 그들의 매일이 관객에겐 '톰 소여의 모험'처럼 보이는 이유다.

행동파인 이와미는 의식하지 못한 새 '리더'가 된다. 그가 딱히 경험이 출중한 것도 아닌데, 그냥 나서다 보니 자연스레 형성된 태도다. 테츠오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그가 간혹 보이는 작은 행동은 세 친구 모두의 변화를 상징하듯 다가온다. 타니는 다른 둘에 비하면 무색무취하지만, 상반된 유형의 둘 사이에서 중력을 조율하는 역할이다. 그렇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변두리 청춘의 조합이 완성된다.

빈 구멍 여기저기 뚫린 셋이 접한 사회생활 선배들의 역할이 중요한 법. 우선 그들을 아르바이트로 추천한 직장 선배 '이타미'가 있다. 퉁명스럽고 얼핏 험악한 인상이지만, 그는 친형처럼 세 친구를 데리고 다니며 허물없는 사이가 된다. 모든 게 막막한 셋은 그에게 장난도 곧잘 치고 엉기기도 하지만, 그가 표정 바꿔 엄하게 던지는 지시엔 군말 없이 따른다. 사장과 사무실 직원 역시 다가서기 좀 힘들긴 해도, 각자의 애환이 진하게 존재해도 악의와는 거리가 멀다. 처음엔 묘한 궁금증을 안기던 경찰 '지로'도 그들의 겨울나기와 어느새 섞여든다. 가족과 교사 외에 아마 세 사람이 거의 처음 접하는 사회 선배들은 묵묵히 그들의 변화에 조응한다.

삿포로의 겨울을 놀이터 삼아

 <굿 포 낫씽> 스틸
<굿 포 낫씽> 스틸㈜디오시네마

후속작들에서 대도시의 뒤편, 어스름한 석양과 먼동이 터오는 새벽의 푸르스름한 색감을 절묘하게 묘사하는 광경과 달리, <굿 포 낫씽>의 거칠고 흑백으로 제한된 화면은 처음엔 낯설기만 하다. 한국 독립영화가 종종 구사하는 '스킬', 로케이션 제약과 촬영 간소화를 위한 인위적 흑백 도입과 대동소이한 작업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물론 그 측면도 일정하게 작용했겠지만, 감독의 비전이 고작 그 정도로 그치진 않아 보인다.

눈에 파묻힌 삿포로, 그 구석 어딘가 변두리에 자리한 작은 보안회사 사무실은 아침마다 제설 작업을 빼먹는 순간 작업용 차량이 출입하기도 힘겹다. 양복을 차려입어도 신발은 동계 장화를 착용할 정도다. 뒷골목 온갖 구질구질한 요소가 눈 덕분에 푹 덮히는 부수적 효과가 파생하는 걸 감독은 절묘하게 활용한다. 세 친구 앞에 놓인 온갖 유혹과 위험 대신에, 대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흙수저' 청춘이 겪게 마련인 우울한 현실을 탈색시키고 즐겁고 신기한 모험의 시간으로 변모하는 데 일등공신으로 써먹은 것. 흑백 카메라는 그런 극적인 명암 대비를 더 강조하는 장치로 제 역할을 맡는다.

작은 보안업체의 일상은 대수로울 게 없다. 경찰서에서 사건 발생 정보를 남보다 한발 빠르게 입수해 영업에 활용하고, 매일 외근하며 방범 카메라를 설치하거나 점검한다. 사장은 거래처를 확보하고, 사무실 직원은 서류 업무를 맡고, 현장직원은 조수들을 거느리고 반복 업무를 수행한다. 겨울철 일이 그리 많지 않고 사건도 많지 않은 동네라 회사는 한가하다. 아르바이트 구해달라 해서 맡겼더니 3명은 감당할 수 없다며 푸념하는 사장에게 직원은 셋 중 한둘은 그만두지 않을까 하며 받아넘긴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는 말처럼 들려도 세 주인공 앞에 닥칠 미래를 예지하는 징후 격이다.

소소하던 일상에 작은 파문이 발생한다. 고즈넉하던 업무에 균열이 온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지만, 호들갑 떨며 난리가 지나간 다음엔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어느덧 한 달이 채워진다. 이제 그들의 인연은 곧 종결될 듯하다. 하지만 한 달 월급 받고 기억까지 멈추는 건 아니다. 또다시 우연히 접한 사건으로 추억은 과거로만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사고뭉치 세 친구와 그들을 둘러싼 눈 속 작은 우주를 따스하게 보듬듯 기록하는 데 충실하다. 여기에 원색 질감을 추가하면 곧바로 우리가 익히 아는 '미야케 쇼 월드'로 진입하는 경로로 기능한다.

일본 차세대 거장의 궤적

 <굿 포 낫씽> 스틸
<굿 포 낫씽> 스틸㈜디오시네마

<굿 포 낫씽>을 본다는 건 이제 '차세대'를 넘어 곧 현재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이름 중 하나이자, 일본 영화의 새로운 물결로 기록될 감독의 기원을 탐구하는 여정이 된다. 단조롭다면 단조로운 이야기 구성, 거칠고 성마른 풍경이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되는데 일단 눈이 적응하먼 신기하게도 온통 차가운 화면이 온기를 머금고 악동들의 장난질이 흐뭇하게 보인다.

그런 특별한 영화적 체험은 이미 감독의 근작들을 봤기 때문에 가능한 연상 효과 덕택이다. 게다가 제작과 각본부터 촬영, 편집까지 거의 모든 역할을 감독 홀로 감당했기에 더욱 미야케 쇼란 작가의 원형질을 추정하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된다. 증거로 주장하기에 이만한 조건이 없는 셈. 그렇게 감독의 작품을 특정하는 무형의 기운이 관객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아울러 주목할 만한 영화 작가들의 초기작과 후일 작품 경향을 연결하는 작업의 흥미를 다시금 상기하도록 해주는 효능도 환기한다. 그저 단품으로 작품을 일회성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 감독이나 넓게는 시대별 조류까지 확장하는 '관객이 탐험가가 되는' 모험을 이 영화 속 세 친구처럼 감행하는 도전의 기회를 얻는 것. <여행과 나날>을 기분 좋게 봤다면, 혹은 보기 전 예행연습 삼으려면 <굿 포 낫씽>은 충분히 괜찮은 선택이 될 테다. 시간순으로 내려오느냐 거슬러 오를 것이냐 결정할 여지가 주어진다는 건 관객에겐 즐거운 고민이다.

<작품정보>

굿 포 낫씽
やくたたず
good for nothing
2010|일본|드라마
2026.01.14. 개봉|76분|15세 관람가
감독/각본/촬영/편집/제작 미야케 쇼
주연 시바타 타카야, 타마이 히데키, 산단 토모아키
출연 쿠시노 코이치, 아다치 토모미츠, 미나미 토시오, 카타가타 카즈요
수입/배급 ㈜디오시네마

 <굿 포 낫씽> 포스터
<굿 포 낫씽> 포스터㈜디오시네마


굿 낫씽 미야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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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