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작이다", "설정이 허술하다"는 평가가 이어졌지만, 영화 <대홍수>는 넷플릭스 3주간 1위를 차지했다. 작품성에 대한 비판과 대중의 선택이 엇갈리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특히 SF 장르에서는 꽤 익숙한 풍경이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이 영화가 단지 볼거리가 부족해서 화제가 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비평의 기준을 다른 곳에 두어야 했던 것일까.
과학 교사의 시선으로 본 '대홍수'
필자는 중등 과학 교사이자 과학 교육 연구자로,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SF 영화 속 과학기술이 실제로 가능한지, 그리고 그 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오랫동안 이야기해 왔다. 영화는 교실에서 과학 개념을 설명하는 도구이자, 미래를 상상하는 창이기도 했다. 그런 맥락에서 <대홍수> 역시 단순한 '흥행 영화'가 아니라, 과학과 인간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텍스트로 다가왔다.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 <대홍수>는 흥미로운 지점을 드러낸다. 인공지능 연구와 시뮬레이션, 대홍수라는 재난 설정은 과학적으로 보면 다소 투박하고 정교함이 부족하다. 학생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토론의 대상이 될 만한 허점들도 보인다. 이런 '검증의 눈'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기술보다 먼저 작동한 감정의 힘
▲영화 <대홍수>의 한 장면.재난 속에서 아이를 업고 끝까지 버티는 어머니의 모습이 관객의 감정을 붙든다.송민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끝내 필자의 시선을 붙든 것은 기술적 설정이 아니었다. 재난이라는 거대한 상황 속에서 아이를 업고 끝까지 버티는 한 어머니의 표정, 그 감정의 무게감이었다. 영화는 미래 기술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정작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핵심 동력은 AI 알고리즘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켜내려는 본능'에 있었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가 떠오른다. 블랙홀과 웜홀, 상대성이론이라는 고난도 물리학을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가 지금까지도 '인생 영화'로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킵 손(Kip Thorne)의 자문을 받은 정교한 과학 고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관객의 가슴을 때린 것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시간을 견뎌낸 딸의 서사였다. 시공간을 초월해 닿은 신호는 양자역학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리움의 결정체였다. <인터스텔라>에서 과학이 장대한 서사를 위한 무대였다면, 그 무대를 채운 배우는 '가족애'였다.
<대홍수> 역시 이와 유사한 문법을 따른다. AI 시뮬레이션과 타임루프라는 설정은 도구일 뿐, 카메라가 집요하게 비추는 것은 아이를 짊어진 어머니의 사투다. 관객들이 스크린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던지는 질문 또한 "저 기술이 가능한가?"가 아니다. "나라면 저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이의 손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질문이다. 이것이 <대홍수>가 재난 영화의 탈을 쓴 '모성 드라마'로 읽히는 이유다.
SF는 미래를 말하지만, 흥행은 현재의 감정에 있다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SF 영화의 성패가 반드시 과학적 정합성에 달려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관객을 마지막 순간까지 붙잡아두는 힘은 신기술의 현란함이 아니라, 납득할 수 있는 감정의 서사다.
혹평 속에서도 <대홍수>가 선택받은 이유는 지금의 관객 정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후 위기와 각종 재난 뉴스가 일상이 된 불안의 시대, 대중은 거대 담론보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더 깊이 반응한다.
<인터스텔라>가 그랬듯, <대홍수> 또한 미래의 과학을 빌려 이야기하지만 결국 도달하는 곳은 현재 우리의 관계다. SF는 가장 먼 미래를 상상하는 장르지만, 그 성공의 열쇠는 언제나 가장 인간적인 감정에 숨어 있다. 그 오래된 공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는 결국, 기술이 아니라 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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