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위기'와 일본영화의 약진은 비교될 수밖에 없다. 2025년, '천만 영화'가 실종된 사이에 옆 나라는 실사 영화 역대 흥행 1위를 갱신하며 '천만 영화'가 40여 년 만에 탄생한다. 그야말로 '사회적 현상'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해소 기미가 없는 스크린 독과점 수혜가 아닌, 입소문을 타고 '역주행'으로 일군 성과다.
일본영화 '뉴웨이브'를 언급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저 한두 작품 흥행이 아니라 차세대 거장이 속속 출현한다. 하마구치 루스케, 미야케 쇼 등 이미 영화 애호가에게 '믿고 보는' 이름 말고도 신세대 작가가 곳곳에서 얼굴을 내민다. 반면, 한국은 왜 '제 2의 봉준호' 찾기에 실패할까? 의문은 깊어 간다.
신성이 또 출현했다. 22살에 첫 장편으로 국제영화제에서 돌풍을 일으킨 오쿠야마 히로시다. 6년 만에 선보인 차기작은 영화감독이라면 한 번은 밟고 싶은 '꿈의 무대', 칸영화제 경쟁 초청 바로 전 단계 '주목할 만한 시선'에 진출한다. 아직 20대, 영화과 좀 오래 다니면 이제 졸업 작품 찍을 연배다. 대체 신작 <마이 선샤인>이 어떻길래?
온통 눈으로 뒤덮인 세상, 소년×소녀 만나다
▲<마이 선샤인> 스틸
그린나래미디어㈜
홋카이도 작은 시골 마을에 처음 눈이 내린다. 긴 겨울이 깃든 것.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다. 곧 방학이다. 6힉년 '타쿠야'는 또래 남학생이 대개 그렇듯, 봄부터 가을까지 야구, 겨울엔 아이스하키를 특별활동으로 택한다. 하지만 소년은 하키에 집중하지 못한다. 결국엔 누구나 꺼리는 골대 지킴이로 자리만 지키는 신세다. 그런 타쿠야의 눈에 같은 아이스 링크에서 스케이트 연습에 몰두하는 '사쿠라'가 눈에 들어온다. 춤을 추듯 빙판을 수놓은 소녀의 동작에 소년은 매혹에 빠진다.
그날 이후, 하키 대신 타쿠야는 아이스링크에서 남들 다 하교한 후 혼자 사쿠라의 동작을 어설프게 흉내 낸다. 서툴지만 진심이다. 소년에겐 처음 일어난 변화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사쿠라의 코치 '아라카와'는 뜻밖의 기회를 제안하며 손을 내민다.
내용은 파격적이다. 싱글 연습만 하던 사쿠라와 초심자 타쿠야가 혼성 '아이스 댄스' 승급에 도전하자는 것.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동경하던 상대와 짝이 된 타쿠야는 스케이트 훈련에 몰입한다. 처음엔 코치의 제의가 썩 내키지 않던 사쿠라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이제 소년과 소녀는 빙판에서 스스럼없이 합을 맞추며 다가올 승급 심사를 기다린다. 훈훈하고 애틋하다.
살면서 처음으로 낮이고 밤이고 열중할 대상을 찾은 타쿠야의 실력은 짧은 시간에 발전하고, 코치와 함께 셋은 겨울방학의 빛나는 추억을 만들어간다. 과연 소년은 두근대는 첫사랑, 재능의 발견을 동시에 이룰 수 있을까? 승부의 시간이 다가온다.
주어진 조건을 극대화하는 차세대 작가
▲<마이 선샤인> 스틸
그린나래미디어㈜
<마이 선샤인>은 흔히 연상하듯 일본 청춘 로맨스에 스포츠 장르의 매력을 덧붙여 간결하면서도 오밀조밀한 이야기와 풍경을 선사한다. 요즘 영화답지 않게 딱 '90분', 1시간 반 동안 승부를 거는 집중력만으로도 반색할 예비 관객이 제법 될 테다. 다만, 그저 '팬시'한 청소년 연애담이라면 차세대 작가로 국내외 집중 조명을 받기엔 조금 모자라다. 대체 감독은 어떤 '힘'을 두 번째 장편에 꼭꼭 숨겨둔 걸까.
압도적인 홋카이도의 눈으로 가득한 배경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정말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하얀 설원에 푹 파묻히듯 사라진다. 물론 춥고 다니기 불편하겠지만, 극장 좌석에 앉아 영화를 응시하는 관객에겐 겨울 휴가지에서 '불멍' 하듯 호사스러운 체험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점, 대개 압도적인 겨울 설원을 조명한다면, 자신이 영화 좀 안다고 자부하는 관객이라면 당장 '와이드 스크린' 화면비가 당연하다 여길 테다. 좌우로 쫙 펼쳐진 화면비가 보는 이를 스크린에 펼쳐진 드넓은 풍경의 감흥을 더 극대화한다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답답한 4:3, 직사각형을 고집한다. 흔히 텔레비전에서 주로 보는 비율, 영화에선 인물의 표정에 집중하는 드라마에서나 선택할 화면비다. 기껏 어렵게 장소를 섭외해 놓고 대체 어쩌려는 걸까?
감독은 확고한 입장을 피력한다. 자신의 비전을 최대한 간섭 없이 보장하기 위해 오쿠야마 히로시는 촬영과 편집까지 모두 도맡았는데, 실내와 야외 장면 촬영 방식이 완전히 다른 선택을 감행한다. 실내 장면은 대개 주인공들이 가족이나 지인과 대화하거나 수업에 참석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되지만, 감독이 가장 공들여 집중한 장면 대부분은 빙판에서 스케이트 연습에 할애한다.
아이스 댄스가 단순히 스포츠 장르를 넘어 소년과 소녀의 내밀한 교감을 형상화해야 하기에, 촬영 역시 최대한 밀착해 호흡을 공유해야만 한다. 이걸 감독은 직접 스케이트를 탄 채 카메라를 어깨에 이고 가능한 선에서 한 번의 호흡으로 장면을 뽑아내고자 도전한다. 즉 스케이트를 탄 채 흔들리며 '핸드헬드' 기법, 심지어 '롱 테이크' 촬영을 고수한 것. 30분 넘게 배우들의 나이답지 않은 유려한 피겨 스케이팅을 카메라에 한 컷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집념의 개가다.
야외 장면은 정반대의 기법으로 승부수를 던진다. 그림 같은 홋카이도 설원과 눈 덮인 아기자기한 작은 마을은 그 자체로 동화 속 풍경처럼 다가온다. 풍경 효과를 최대치로 뽑아내고자 감독은 카메라를 고정한 다음 이동하지 않는다. 멀리서 전체 풍경을 담아내되, 자연의 일부가 된 양 인물들을 정중앙에 배치한다. 여기에 4:3 화면비는 집중과 여백을 동시에 구현한다.
당연히 '와이드'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뒤엎은 감독의 선택엔 다 '계획이 있었다.' 그 결과 영화의 야외 장면은 하나하나가 모두 홋카이도 관광 홍보용 그림엽서로 기능한다. 영화 속 배경 시간대와 딱 맞아떨어지는 한겨울에 개봉한 일정 역시 작품의 의의를 극한까지 추구하는 선택이다.
학원 로맨스물의 가벼움 대신
▲<마이 선샤인> 스틸
그린나래미디어㈜
여기에 더해 타쿠야와 사쿠라 역 청소년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연습 장면을 표현할 수 있도록 경력과 배경을 중점에 둔다. 연기는 연습하면 되지만, 오랜 시간 갈고 닦아야 하는 기예는 단기간 수련으로 몸에 배기 힘든 탓이다. 감독은 연기 경험이 적더라도 오히려 작중 캐릭터에 녹아드는 적성을 더 중시한다.
아마 청소년의 춤 장면으로 '미장셴' 장인 이와이 슌지가 선보인 <하나와 앨리스> (2004) 속 아오이 유우의 발레 장면 이후 최고로 공들였을 사쿠라의 '수미상관' 스케이트 연습 장면은 그런 선택과 집중의 결실이다. 실제 일본 유소년 아이스 댄스 경연 2위에 빛나는, 하지만 영화 여기는 <마이 선샤인>이 처음인 나카니시 키아라를 발굴한 덕분에 가능한 성취다.
2025년 일본 최대 흥행작 <국보> 더블 주인공 '슌스케' 아역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코시야마 케이타츠가 나카니시 키아라와는 상반된 '톤 & 매너' 연기를 구사한다. 사쿠라는 처음부터 소질이 탁월하지만, 타쿠야는 스케이트도 못 타는 초심자에서 파트너와 합을 맞추며 자신감을 얻는 캐릭터다. 실제 배우는 4살 때부터 갈고 닦은 스케이트 실력을 감추다 개방하는 내공을 구사하며 두 주인공의 존재감을 관객에게 각인한다. 계산된 연기가 아니라, 실제 그 나이에 설정이 부여한 개성을 지닌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다가오는 것.
'멘토'가 되어주는 코치 아라카와는 '어른', 그것도 삶의 영락을 고루 맛본 성인이란 특징을 온몸에서 발산하는 존재다. 그에겐 타인에게 말하기 힘든 비밀이 있고, 이 때문에 성공과 명성을 희생해야 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어릴 적을 떠올리게 하는 타쿠야에게 애착을 갖고 소년의 자신감을 북돋지만, 그로 인해 오해를 산다. 그러나 묵묵히 이를 받아들인다. 이미 그런 상처가 적잖게 퇴적된 상황이기에 그럴 테다. 여기에 꼭 필요한 조력자만 더한다.
사쿠리는 단아하고 모범적인 외양에 격정을 숨긴 존재다. 중학교 1학년, 어른의 세계를 엿보며 사춘기의 욕망에 들어선 상태. 그런 자신에게 좀 더 관심을 두고 집중하길 기대하던 유능한 코치가 불쑥 끼어든 타쿠야에게 더 마음을 열고 살뜰하게 보살피는 걸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소유욕과 애정 결핍이 뒤엉킨 감정으로 파열음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쿠라가 '빌런'인 건 아니다. 그저 그 나이 또래 청소년이라면 겪어봤을, 누구나 과거를 회상하다 문득 깨닫는 감정을 표출한 것뿐이다. 여전히 사쿠라는 노력과 재능을 결합해 미래를 향해 전진할 테다.
우리들 자신의 청춘 성장담
▲<마이 선샤인> 스틸그린나래미디어㈜
타쿠야는 자신이 태어나 처음 매료된 소녀와 그녀가 선보이는 아이스 댄스의 매혹을 경험하며 기나긴 북쪽 땅의 겨울을 보낸다. 아마 소년은 평생 그 겨울을 잊을 수 없을 게다. 그러나 야구연습 중 멍하니 첫눈을 바라보며 신나던 경험은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스노우맨' 동화에서 눈사람의 운명이 그런 것처럼. 소년에겐 동경하는 첫사랑 대상과 인생의 좌표를 알려준 어른이 그 겨울을 함께 보낸다. 이보다 더 '성장물' 정석이 또 있을까?
눈이 녹고 봄의 햇살이 청명하게 소년을 향한다. 제법 의젓해진 채 봄 길을 걷는 타쿠야지만, 누군가와 기약 없는 작별을, 누군가와는 새로운 계절처럼 설레는 재회가 그를 기다릴 법하다. 덧없는 희미한 추억담이 될 수도, 어쩌면 되찾는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봄날의 햇살은 영화 제목처럼 인생에 몇 번은 반드시 돌아오게 마련이니까.
그런 공감대가 어느새 (감독이 치밀하게 꾸민 그대로) 관객 개별의 꼭꼭 숨겨둔 추억의 사진첩을 열게 만든다. 마지막이 다가와도 관객은 콩닥거리는 심장으로 소년과 소녀의 다음을 상상하게 될 테다. 마침 테마 송도 알콩달콩함을 넘어 주인공의 미래를 기약하는 '송가'로 착착 감긴다. 실로 효능이 탁월한, 한편으론 질투심 그득하게 하는 일본 20대 감독의 눈부신 성취다. 눈 오는 겨울에 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작품정보>
마이 선샤인
ぼくのお日さま
My Sunshine
2024|일본|드라마, 스포츠, 로맨스
2026.01.07. 개봉|90분|전체관람가
감독/각본/촬영/편집 오쿠야마 히로시
출연 코시야마 케이타츠, 나카니시 키아라, 이케마츠 소스케
Theme Song 험버트 험버트 『나의 해님(ぼくのお日さま)』
수입 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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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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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 '또' 등장한 차세대 거장, 매혹된 소년의 시간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