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현장을 말한다책 표지
커뮤니케이션북스
12년 '인간극장' 제작, 퇴직금도 못 받았다
제작자가 방송에 열정을 쏟는 만큼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그건 시스템의 문제예요. 우리 같은 창작자의 권리가 능력과 관계없이 철저하게 무시되는 현실이 더 크다는 게 우리를 힘들게 하죠. -148p 안재민 PD
지난해 10월 서울남부지법에선 KBS 간판 다큐 프로그램 <인간극장>을 12년간 제작해 온 독립PD가 외주제작사를 상대로 제기한 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촬영과 편집을 프리랜서 계약으로 위탁받았다고 해도 업무 형태부터 워크숍이며 송년회 참석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노동자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해당 팀 14명의 제작진 가운데 대다수가 프리랜서 신분이었다고 했다. 제작기간 동안엔 직원처럼 부렸지만 정작 계약관계가 해소될 땐 퇴직금조차 주지 않으려 들었다. 어디 외주제작사만의 문제일까. 프로그램 제작을 외주업체에 맡기고 구체적인 상황은 나 몰라라 하는 방송국의 문제가 근간에 자리하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먼저 시작한 감독으로서 이 정도 하면 먹고 살 수 있고, 기본적인 삶이 보장된다는 걸 모범으로 보여 주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그게 안 되니 많이 안타깝고 미안하죠. -257p 문정현 감독
방송에 다큐를 납품하는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립다큐 PD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영화제며 국가기관, 기업 등으로부터 제작비를 따내는 피칭부터가 쉽지 않을뿐더러, 제작비 지원을 받더라도 영화 바깥 삶을 영위할 돈부터가 쪼들리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갈수록 척박해지는 극장 상황, 그중에서도 관객이 들지 않는 다큐의 현실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겠다. 누구나 다큐멘터리가 뭔지는 안다. 그러나 이달 본 다큐를 물으면 십중팔구 '인간극장' 같은 TV편성물, 아니면 그조차도 없게 마련이다. 방송국 바깥에서 독자적으로 제작한 다큐영화를 보는 사람은 길가에 심긴 포플러나무만큼 마주하기 힘든 존재다. 시장이 외면하니 존재할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음을 이 책이, 또 이 책에 말을 얹은 이들의 작품이 증명한다. 적어도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나는 그렇게 외치고 있다.
다큐인이라면 현장에 가야 한다
방송국에서 자본주의 논리를 가지고 단지 관객들의 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이건 순서가 잘못된 말이에요. 관객들이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가지려면 방송국의 정형화된 다큐멘터리뿐만 아니라 독립 영화계의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관객들의 관심이 생길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영국의 BBC에는 전 세계에서 제작되는 다큐멘터리 중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들을 골라서 방영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또한 이 프로그램을 위해 전 세계의 다큐멘터리 감독을 대상으로 작품 공모를 해서 제작 지원도 하거든요.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넓히고 지속적인 제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런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공중파 방송이 그렇게 하지 않죠. -324p 백연아 감독
국민이 낸 수신료로 운영되는 KBS조차 영국 공영방송인 BBC와 다큐 제작 비중을 비교하면 민망할 따름이다. 한국의 시민들은 전 세계 다큐가 전하는 발 빠르고 생동감 있는 사실들에 다가서지 못한다. 지난 몇 년간 세계적 수준의 다큐가 기성 언론이 닿지 못한 이 시대의 온갖 진실을 파헤쳐 전해왔단 걸 고려하면 이는 책임의 방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뿐인가. 외주업체며 독립PD들이 처한 생태계를 개선하려는 노력 또한 전무하다. 그 결과가 상식에 못 미치는 현실, 제 간판 프로그램을 12년간 제작해 온 외주PD가 퇴직금조차 소송을 거쳐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결코 만만치 않은 현실 속에서도 이들을 움직이는 것이 무언지를 돌아봐야 한다. 비용 때문에, 그것이 효율적이란 이유로 언론이 현장에서 철수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러나 언론이 떠난 자리를 지켜온 다큐 감독들이 있단 걸 우리는 기억해 마땅하다.
한국 3대 다큐영화제 중 하나인 반짝다큐페스티발에서 지난해 마련한 포럼 '현장, 연대, 그리고 다큐'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 자리에 나선 어느 감독은 각종 소수자가 투쟁하는 현장에서 기자를 만나기가 몹시 힘들다고 증언했다. 일선 취재기자로 6년을 일한적 있는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월급쟁이 기자가 비운 자리를 무급의 활동가며 다큐감독들이 지키는 모습을 수시로 목격했으므로. 언론이 떠난 자리를 지키도록 하는 힘은 무엇이었나. 누군가는 현장을 기록해 알려야만 한다는 책임감이 아니었나. 이 책 곳곳에서 엿보이는 것도 그와 같은 것이다. 사회에 대한 책임, 그를 알려 동료 시민을, 세상을 변화케 해야 한다는 의지 등이다.
법원·검찰만 못 보는 공익성, 다큐멘터리는 죄가 없다
1980년대에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에 자극을 받은 여러 선배가 함께 <파업전야>를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현장에 깊숙이 들어가 미디어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대신해 줘야 한다, 공동체를 이뤄 이 활동을 지속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261p 태준식 감독
세상을 바꾸려는 열망과 분출하는 창작욕구, 스러지는 것들의 곁을 지키려는 책임감 사이에서 분투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카메라 하나만을 무기로 각자의 현장에서 담아낸 풍경들이 다큐 안에 담겼다. 그 풍경은 우리가 사는 사회와 결코 무관치 않다. 책이 나오고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여전히 한국 다큐계의 중추로 역할을 다하는 이들에게서 그 저변에 깔린 철학을 발견한다.
대중의 외면과 부족한 지원 속에서 살길을 찾아 바깥으로 나간다던 이들의 상황이 오늘도 크게 달라지진 않은 듯 보인다. 그럼에도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이 있다면, 각자의 현장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다큐멘터리스트의 결의일 테다. 검찰과 법원이 유죄로 판단한 정윤석 감독에게 한국 영화인들은 도리어 올해의 독립영화인이란 영광을 안겼다. 그건 그가 끝끝내 지키고자 했던 다큐의 정신,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연대한 결과일 테다.
지난 몇 년간 영화평론가로 수많은 다큐를 접한 결과, 다큐가 언론 못지않게 공익성을 추구하고 이행해왔음을 확신한다. 책에도 언급되는바, 다큐인은 그 스스로를 대변할 매체를 갖지 못하였다. 기성 영화매체는 극영화 중심으로 다큐안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담론을 충실히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드물고 깊은 인터뷰집은 다큐인 스스로가 저널리즘적 역할을 놓지 않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그렇다면 이들 중 하나인 정윤석이 어떻게 유죄일 수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