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바그> 스틸
오드(AUD)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머리가 지끈거리며 두통이 올 지경이다. 영화 역사에 찬란하게 기록된 걸작의 제작 과정과 누벨바그 사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름들이 속속 화면에 정신없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어디서 본 듯한 장면과 인물들의 면면이 등장할 때마다 눈을 큼지막하게 뜨고 필사적으로 뇌세포를 더듬으며 기억을 끄집어내야 한다. 글자로만 읽었거나 어렴풋이 흐릿하게 남은 인명과 해설을 온전하게 재구성하는 건 가혹한 부담일 뿐이다.
깔끔하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포기, 아니 발상을 전환하기로 한다. 그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영화의 리듬감에 몸과 머리를 맡기고 흘러가는 방법이다. 그러자 이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쉴 새 없이 키득키득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너무나 신나고 즐거운, 마치 작중 고다르와 영화의 친구들이 근심 걱정 태산인 제작자만 제외하고 함께 실실 유쾌하게 웃으며 작업에 임하던 것처럼.
무엇보다 시각적 황홀경을 제공하는 건 영화의 만신전에 오른 숱한 이름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올림포스의 신들이 화면에 강림하듯 속속 연달아 출현한다. <네 멋대로 해라> 촬영 과정이 기본 배경이니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고다르와 진 세버그, 장 폴 벨몽도는 물론, 영화에 참여한 트뤼포와 샤브롤, 평론 시절부터 동료인 아녜스 바르다,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등 쟁쟁한 이름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울 지경이다. 여기에 우정 출연 찬조라도 하듯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장피에르 멜빌, 로베르 브레송까지 시침 뚝 떼고 슬그머니 끼어든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시각적 황홀경을 누리는 호사에는 이견이 달리 있을까?
놀라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얼마나 집요하게 캐스팅에 골몰했을까 궁금할 만큼 실제 인물의 대역으로 등장하는 거의 모든 배우가 당사자와 놀랍도록 닮은꼴이다. 섭외 담당자를 칭송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다. 기성 배우 대신에 최적화한 이미지와 캐릭터를 최우선 설정한 덕분일 테다. 의도적으로 신예 연기자 위주로 고른 데다, 훗날 프랑스 국민배우로 등극한 장 폴 벨몽도 역은 아예 <누벨바그>가 장편 데뷔작이라 할 정도로 <네 멋대로 해라> 시절 고다르에 빙의한 마냥 링클레이터 감독은 남이 뭐라건 자신의 선택을 확신하며 집중한다.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영화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화면 속 이미지는 극한의 호흡으로 1959년의 어느 날,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공간을 부활시킨다. 마치 영화와 현실을 왕복하며 조립하듯 작가의 상상을 현실로 옮기던 누벨바그 작가들의 자세처럼, 감독은 그 역사의 현장을 '전설'이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처럼 펼쳐 보이는 것이다. 영화 악동의 모험을 보면서 꿈을 키운 또 다른 악동이 경의를 담아 어깨에 힘 빼고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실험이다. 이건 '찐'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도전이다.
'영화의 위기' 논하는 시대에 현대 영화의 시작 복원한 뜻은?
▲<누벨바그> 스틸오드(AUD)
적당히 햇살 따스한 여름날에 세상 고민 다 내려놓고 속 이야기 다 늘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과 교외로 야유회를 떠나 바보처럼 아무 말이나 깔깔 웃으며 즐겁던 경험처럼 <누벨바그>를 본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랬다. 유쾌한 여운은 꽤 오래 뇌리에 남아 입꼬리를 계속 올라가게 했다. 보는 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영화라면 좋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다음에 깃드는 건 관성과 정답에 기대지 않고 구르는 돌처럼 끝없이 질주하는 당대 영화인들의 혁신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그런 태도를 현재형으로 재현하는 링클레이터 감독의 진의 추적이다. 자신이 20살에 처음으로 보고 평생 잊지 않고 간직하게 된 <네 멋대로 해라>의 감흥,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곱씹게 한 영감을 바로 지금 현재의 관객이 (자기가 겪은 것처럼) 체험하길 기대하는 영화광의 소망이 흠뻑 전해진다.
1959년의 고다르는 그저 안정된 흥행 성공을 노리며 검증된 문학 작품 각색에 치중하며 고루해지던 동시대 프랑스 주류영화 대신에 불확실하고 어지러워도 흥미롭고 낯선, '새로운 영화'를 선보이려 도전했다. 그런 고다르가 기대한 건 점잖지만 알맹이 없는 덕담이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악플'이 난무하며 '영화란 무엇인가?' 토론이란 불씨에 기름을 붓는 발화점으로의 '쓰임'이었을 게다. 각자 취향이라며 다들 상호 토론을 꺼리는 오늘날 되살려야 할 미덕이기도 하다. 물론 욕을 먹기 딱 좋은, 부담을 감수해야 가능한 도전이다.
그 도발을 위해 발상을 전환하며 체급을 가볍게 만들고자 집착을 거듭한다. 그와 동시에 선배들에게 배울 건 배우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려 애를 쓰는 데에도 게으르지 않다. 영화 속 제작기를 보고 있자면, 영화의 역사가 <네 멋대로 해라>로 한데 모이고 그에서 다시 흘러나오는 걸 직관하는 기분이다. <누벨바그>를 본 다음, <네 멋대로 해라>를 다시 찾는 건 자연스런 수순이다.
과도한 계산이 몸을 무겁게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정반대로 접근한 흔적,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법칙이 된 점프 컷, 즉흥연기, 핸드헬드 촬영기법 등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자면, 시장과 산업의 위기를 홀로 근심하기보단, 어차피 기존 판은 망할 테니 불탄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영화를 상상하는 즐거운 모험을 떠올리게 될 테다. 그게 감독이 원하는, 고다르가 1959년 여름에 꿈꾸던 게 아닐까?
<작품정보>
누벨바그
Nouvelle Vague
2025|프랑스, 미국|드라마, 전기물, 코미디
2025.12.31. 개봉|105분|12세 관람가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 기욤 마르벡, 조이 도이치, 오브리 뒬랭
수입 오드(AUD)
배급 메가박스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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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