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을 이 영화로 시작한다면, 당신은 행복해질 겁니다

[리뷰] 영화 <척의 일생>

*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척의 일생>은 인간을 '소우주'에 비유한 정신과 우주의 원리를 축소한 한 인간의 일대기를 다룬다. 우연의 결정체인 부족한 인간일지라도 가능성을 품은 반짝이는 존재라고 밝힌다.

광활한 대우주 속 한낱 먼지 같을지라도 그 자체로 값진 인생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위로다. 무언가를 이루지 않았다고 해도 당신은 누군가의 우주이며 그 자체가 이미 우주라는 담담한 응원이다.

스티븐 킹 덕후의 팬심

 영화 <척의 일생> 스틸컷
영화 <척의 일생> 스틸컷워터홀컴퍼니㈜

국내에는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로 번역된 4편 중단편 한 편이다. 세계적인 이야기 꾼 '스티븐 킹'의 동명 단편을 원작으로 한다. 약간의 공포감도 가미된 독특한 이야기다.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을 가진 스토리텔러의 필력은 공포, SF, 드라마, 스릴러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크게는 두 부류로 나뉜다. <미저리>, <샤이닝> <닥터 슬립>, <그것> 같은 호러 스릴러 장르와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스탠 바이 미> 류의 인생 드라마다.

그의 업적은 수많은 숫자로 증명된다. 데뷔 50여 년 동안 현역이란 타이틀과 더불어 전설로 불리는 이유다. 특정 작품은 발간된 후 1주일 내외 영화화 결정이 되기도 하며, 70여 편 이상의 작품이 영상화 되었다. '가장 많은 작품이 영상화된 작가'로 기네스 기록을 보유 중이다.

<척의 일생>은 스티븐 킹의 소설 중에서도 장르적 색채 보다 드라마적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심리 호러 장르의 신성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의 각색과 연출로 완성됐다. 마이크 플래너건은 저예산 공포 영화부터 시작해 넷플릭스 시리즈 <힐 하우스의 유령>, <블라이 저택의 유령>, <어둠 속의 미사>, <어셔가의 몰락>을 연출한 실력자다.

드라마적 구성과 호러 색채를 가미한 웰메이드 작품을 잘 만들어 내는 감독이다. 스티븐 킹의 오랜 팬으로서 존경을 담아만든 기교가 전해진다. 영화 <제럴드의 게임>, <닥터 슬립>, 시리즈 <캐리>를 연출했으며, 차기작으로 고전 영화 <엑소시스트>를 준비 중이다.

결말부터 보여주는 패기

 영화 <척의 일생> 스틸컷
영화 <척의 일생> 스틸컷워터홀컴퍼니㈜

구성이 독특하다. 형식과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스티븐 킹의 특성을 따른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척의 생애를 총 3막부터 1막으로 거꾸로 보여준다. 관객은 이미 결말부터 시작하게 되지만 오히려 궁금증이 커지는 구조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척의 사진과 영상이 포인트다. "근사했던 39년에 대해, 고마웠어요 척"이란 메시지는 미스터리함을 꾸준히 심어 준다. 아무런 정보 없이 본다면 최고다. '대체 이 영화 뭐지'라며 영화 속 캐릭터와 동일한 심정을 공유하게 된다.

3막의 시작은 지구 종말을 앞둔 사람들의 사정을 다룬다. 인터넷은 끊기고, 싱크홀로 도로는 파괴되고, 급수도 중단된다. 희망을 찾기 힘든 사람들은 삶을 스스로 저버리거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달려간다. 그마저도 어려운 사람들은 홀로 종말과 마주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종말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시계는 계속 흘러간다. 이와는 별개로 TV나 라디오, 거리에는 '척 크랜츠(톰 히들스턴)'의 39년 인생을 축하하는 멘트가 가득하다. 대체 척이 누구란 말인가. 꽉 막히고 지루한 인물 같아 보일 뿐, 그 누구도 척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3막은 과학교사 마티(치웨텔 에지오포)가 전처 펠리샤(카렌 길런)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 할애한다.

2막에서부터 척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세미나 때문에 들린 어느 동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척이 우연히 드럼 버스킹에 매료되어 즉흥 댄스를 선보인다. 관심을 받지 못해 시무룩하게이 공연을 하던 드러머와 무언의 눈빛 교환을 주고받던 척은 몸을 움직인다. 둠치 두둠칫. 이를 구경하던 한 여성과 듀엣으로 공연을 벌인다. 잠자던 댄스 세포가 되살아나 잃어버린 기억을 깨운다. 척은 오랫동안 잊고 지낸 삶의 아름다움을 오랜만에 곱씹는다.

드디어 1막에서는 척의 유년 시절을 다룬다. 사고로 부모를 잃고 조부모님과 살게 된 어린 척. 깊은 슬픔을 할머니의 도움을 이겨 낸다. 할머니에게 배운 다양한 춤 동작은 학교에서도 이어진다. 춤 동아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며 댄스파티의 스타가 된다. 그때의 인연을 빌어 결혼으로 이어지고 척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동반자로 함께 한다.

올해도 수고 많았어요, 당신!

 영화 <척의 일생> 스틸컷
영화 <척의 일생> 스틸컷워터홀컴퍼니㈜

영화는 멀티튜드(multitudes)라는 개념을 통해 다양성, 개성을 넘어 다중우주(멀티버스)의 차원까지 확장한다. 오늘의 실패가 반드시 내일의 실패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수많은 실패가 모여 성공에 가까워지는 마법을 선보인다. 삶의 기쁨은 거창한 게 아닌 소소함을 쌓아나간 흔적임을 강조한다. 어제와 오늘, 내일을 살아갈 소시민을 향한 박수와 동일하다. 어쩌면 이런 말을 꺼내는 것마저도 사족으로 느껴지는 무한한 우주와 인간의 경이로움이 먹먹한 울림으로 전해진다.

철학적 사유는 끝없는 물음을 던지며 영감을 유발한다. 어릴 적부터 살아온 빅토리아 양식의 집은 가족 비밀의 열쇠다. 할아버지가 들어가면 안 된다던 다락방에서 척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다. 충격적인 순간이었지만 매몰되지 않고 꾸준히 삶을 이어간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상상하는 재미가 또 다른 포인트다.

'나는 거대하며 수많은 것을 품고 있다(I am large, I contain multitudes)'는 월트 휘트먼의 시 'Song of Myself'의 구절로 짙은 잔향을 남기며 깊이감을 더한다. 우주의 나이를 달력으로 환산한 칼 세이건의 이론도 깊은 감동으로 쌍끌이 한다.

세상을 숫자로 환산하는 할아버지의 정확성과 춤의 리듬으로 즐긴 할머니의 예술성은 척의 소우주를 단단하게 채워 준다. 저물어가는 2025년을 마무리하는 선물같은 영화가 되겠다. 연초에 본다면 2026년을 계획하는 자양강장제가 되어 줄 영화로 손색없다.
척의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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