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즌포스틸컷
콘텐숍
영화는 스노든이 주류 미디어가 아닌 영화인, 그것도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과 비주류 칼럼니스트를 선택한 이유를 보여준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요한 줄기라 해도 좋다. 기성 언론이 저널리즘의 책무를 온전히 해내지 못하고, 심지어는 아예 저널리즘의 영토를 망가뜨리고 왜곡시켰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라 봐도 좋을 정도다.
기성 언론은 국가 안보라는 명분 아래 정부로부터 독립해 있지 못하다. 보도 수위를 스스로 조절하고 국가 보안과 관련한 정보에 대해서는 사실상 자기검열이라 해도 좋을 암묵적 허가를 구하는 경우까지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이와 같은 모습을 프리즘을 통해 바라볼 수 있었던 스노든이 기성 언론을 찾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스노든은 자신의 폭로를 대형 언론사가 일회적 보도 이상으로 추진력 있게 밀어갈 것이라 믿지 못한다.
"나는 뉴욕타임스가 2004년에 무단 도청 기사를 써놓고도, 정부가 요청했다는 이유로 1년 동안 보도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결국 대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도했죠. 그들은 선거 결과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흔히 한국에서 신뢰받는 미 언론이라 알려진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의 문제도 심각하다. 이들 언론은 취재한 내용을 오로지 저널리즘의 원칙에 입각해 판단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와 모종의 거래가 이뤄지고 보도가 축소되거나 소위 '물타기' 되는 경우도 적잖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주류 언론들이 스노든을 정신이나 성격이 이상한 인물, 혹은 국가 기밀을 유출한 배반자로 몰아간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노든의 폭로라는 본질보다도 개인의 신상과 사생활에 집착하는 모습은 여기 미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 세월호 침몰참사 뒤 거의 모든 언론이 유병언의 뒤를 쫓아 온갖 보도를 쏟아냈던 사건만 보더라도.
다큐가 수행하는 저널리즘이 존재한다
반면 감독 로라 포이트러스는 스노든에 의해 믿을 수 있는 저널리스트로 평가된다. 다큐 감독이고 기성 언론의 기자가 아닌 그녀를 스노든은 진짜 저널리즘의 수행자로 판단한다. 그녀는 끝없는 탄압, 정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또 매 입출국마다 공항에서 고초를 겪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면서까지 독자적인 기록과 비판다큐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결과로써 그녀는 스노든의 선택을 받고, 그의 이야기를 기록해내는 것이다.
다큐는 안 되고 언론은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스노든의 폭로를 우리는 인류 문명에 손꼽을 만한 위대한 공익제보라고 말한다.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이 스노든의 폭로를 지지하며, 그가 세계의 자유가 진일보하고 지켜지는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이제는 미국 안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이들을 만나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반면 기라성 같은 미국 언론은 스노든의 폭로와 관련한 일을 좀처럼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저들이 보인 추함을 스스로 알아서다.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은 저널리즘을 수행하지 않는가. 오로지 언론만이 국민의 알권리의 대행자이며 국가의 비판자인가. 밀양에서, 경북 상주에서, 제주 강정마을에서, 용산에서, 그 밖의 수많은 현장에서 언론이 떠난 자리를 지켜온 다큐 감독들이 있었단 걸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 법원은 오로지 언론에게만 저널리즘에 입각한 책임과 면책에의 특권을 부여했다. 지난 시간 정윤석 감독이 걸어온 길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그를 극우 유튜버와 구별하지 않았다. 몹시 불쾌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