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라이트> 스틸
필름다빈
<고스트라이트>에서 댄이 직면한 변화의 바람은 그가 오래도록 애써 회피하기만 한 묵은 감정과 비로소 마주치게 돕는다. 그가 체험하는 낯설고도 매혹적인 경험담은 실은 요즘 각광을 받는 예술치료 정석과 직결되는 설정이다. 그중 연극이 갖는 효능, 일상에서 너무나 익숙한 까닭에 오히려 구속되고 마는 한계를 잠시 벗어나 허구의 존재로 이전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쫓는 기회가 주인공에게 오래전부터 예정된 것처럼 다가왔다.
거친 말투로 부모 속 긁어대던 데이지가 무심코 내뱉던 것처럼, 댄은 가족 부양을 위해 평생 돈벌이에 매진해 왔다. 연극 연습은 돈이 되느냐 위주로 매사를 결정하던 '속물' 댄에겐 오히려 자기 돈 써가며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비생산적 행위 그 자체다. 하지만 그런 돈과 시간 낭비를 그는 기꺼이 감수한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한 사람의 인생에선 결정적 분기점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그의 자부심은 태평양 건너 한국 관객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미국판 '경상도 아저씨'는 중년까지 평이한 삶을 영위해 왔다. 하지만 그들의 안온한 삶에 슬며시 다가온 위험은 근본적이고 기존 방식으론 극복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새로운 조류가 절실하던 참이다. 그전까지 댄은 아마 자녀가 참여한 학교 연극반 공연이나 학예회 말고는 연극 관람을 해본 적도 없었을 테다. 우리 주변의 댄 아저씨 또래 중년 남성들만 봐도 능히 파악할 법한 일이다.
데이지 말처럼 겉으로 아빠의 연극 연습은 아무런 실속이 없는 행위다. 직장에서 견책을 받아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된 상황,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겉보기엔 합리적 대처법이다. 그러나 이 가족이 위기에 처한 게 처음일 리 없고, 오랫동안 그들이 구축한 '회복 탄력성'은 더는 작동하지 않는 상황, 즉 그들 가족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건 너무나 안일한 시각에 불과하다. 그런 그들에게 일상과 접속한 문화예술은 새로운 시각, 이전엔 포착하기 힘들던 관점을 제시하며 새로운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씨줄과 날줄이 절묘하게 직조된 진한 인생 드라마 속으로
▲<고스트라이트> 스틸필름다빈
영화는 공통의 위기에 처한 댄의 가족이 겪은 가정사 비극과 주인공이 참여한 셰익스피어 비극이 기묘한 연결 고리를 형성하며 보는 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과정을 절묘하게 이어간다. 실제 인생 경험담과 연극의 서사는 긴밀하게 조응하며 댄 아저씨가 체험한 것처럼 어느 틈에 하나의 이야기로 승화된다. 아마추어 배우들의 투박한 연극 공연 성공은 이제 댄의 가족이 오래 앓고 있던 깊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생존 투쟁과 떨어질 수 없게 된다.
리타를 제외한 대다수 극단 동료들 역시 평범한 생활인에 불과하다. 오히려 예술가라 뽐내던 이들이 아마추어 공연에 싫증을 내며 떨어져 나간다. 그 빈자리엔 바로 지금 이 순간 필생의 숙제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에 임할 수 있는 동기를 가진 이들이 진입한다. 그렇게 새로운 동료를 만나고, 그들 각자가 처한 인생의 숙제가 공연의 성사를 통해 해소되거나 새로운 도전의 동력으로 기여하는 과정이 모범적으로 펼쳐진다.
누구나 알고 있다고 치부하기 십상인 케케묵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 속 댄 아저씨가 겪는 변화처럼) 낯설고 달리 보게 될 테다. 인생의 깊이, 단맛 쓴맛 다 겪고 나서야 뒤늦게 보이는 게 있듯, 인생사 희로애락이 농축된 대가의 문학작품 역시 최적의 궁합과 때가 있는 법이다. 댄에겐 무척 늦어지긴 했지만, 가장 최적의 타이밍에 셰익스피어가 도착한 셈이다.
어찌 보면 <고스트라이트>는 생활 속에서 작은 숨구멍처럼 연극에 도전하는 모든 아마추어 배우들을 위한 송가와도 같은 작업이다. 작중에서 본격 연습에 빠져들던 댄이 자신이 겪는 가정사 비애 탓에 도무지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은 바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 지금 기준으로 미성년에 불과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심리 이해다. 이 대목은 곧 주인공이 직면한 실존의 위기 근원과 직통하는 핵심적인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자신이 곧이곧대로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외부로 책임을 돌리며 억지로 일어나지 않은 척 외면하던 비겁함과 정면 승부를 회피해온 그가 마침내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자신에게 와닿은 연극 예술과 피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이다. 그 '결정적 찰나'에서 주인공의 선택은 그와 가족을 구원할 수도, 영영 겉으로만 함께할 뿐, 마음 속으론 남남이 될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과연 댄 아저씨의 결단은 어디로 향할까? 그저 편안히 극장 좌석에 기댄 채 목격하는 것으로 족하다. 소리소문없이 개봉하는, 매주 걸리지만, 어느새 잊히는 수많은 개봉작 가운데 그저 사라지기엔 너무나 아까운 의외의 수작을 만났다. 겨울 냉기에 지친 이들, 가족과 오랜만에 함게 볼 작품을 찾는 이들이라면 이 생소한 영화에 도전하는 건 충분히 남는 장사가 되리라 믿는다. 아마 젊을적 연극반 활동해본 이라면, 몰래 연기의 꿈을 간직한 이들이라면 정말 멋진 연말 선물이 되지 않을까? 그런 분들에겐 필수관람 영화다.
<작품정보>
고스트라이트
Ghostlight
2024|미국|드라마
2025.12.17. 개봉|115분|15세 관람가
감독 알렉스 톰프슨, 켈리 오설리번
출연 키스 쿠퍼러, 타라 맬런, 캐서린 맬런 쿠퍼러
수입/배급 필름다빈
2024 96회 미국비평가협회상 독립영화 톱10
202465회 데살로니키국제영화제 관객상
2024 50회 시애틀국제영화제 감독상, 연기상
2025 29회 새틀라이트시상식 코미디/뮤지컬 남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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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