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영화세계> 기자 시절 영화세계사 대표 박인규(오른쪽)와 그의 형 박인수(왼쪽)과 함께 명동거리에서 노만(가운데)
한상언영화연구소
노만은 1950년대 한국영화의 풍경에 대해 '영화사들이 잇따라 생겨났으나 사무실을 따로 얻기에는 임대료도 비쌌고, 영화가 흥행이 안 되면 월세를 낼 수도 없어 주로 명동의 다방에서 모든 일이 결정됐고 영화인들이 모여 있던 곳은 명동 휘가로 다방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연극인들 특히 이해랑 선생은 영화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 활동사진쟁이들!"라고 불렀다고 전했다.
노만은 또한 '잡지에 실리는 배우들이 화보와 브로마이드도 촬영도 명동에 있던 사진관인 신흥사장과 고향사장이었고, 당시 갓 데뷔했던 강효실 배우(최민수 배우의 어머니)의 프로필 사진을 찍은 것도 기억에 남는다'며 '1955년 김기영 감독 <주검의 상자>로 데뷔한 강효실 배우는 전진희라는 예명으로 활동했고, 이때 찍은 프로필 사진이 <영화세계> 1955년 5월호 표지로 쓰였다'고 회상했다.
<영화세계> 이후 <국제영화>, <스크린>, <영화예술> 등으로 잡지사를 옮겼던 노만은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창립 과정에도 기여한다. 1960년 한국영화비평가협회가 만들어졌을 때는 발기인이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인해 한국영화비평가협회가 해산된 이후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로 다시 결성됐을 때는 기획간사로서 기초를 다지는데 일조했다.
1961년부터 한양대학교에 출강해 한국영화사를 가르치게 되는데, 한양대 정용탁 명예교수는 이 시기 노만의 강의를 수강했다. 배우 최불암, 노주현, 임현식, 촬영감독 박승배도 노만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학생들이다.
강의 교재는 자신이 직접 저술한 <한국영화사>였다. <한국영화사>는 1959년 집필을 시작하게 된다. 1958년 대학 졸업 때 그간 영화기자로서 만났던 윤봉춘·이규환·안종화·복혜숙 등 영화인들 인터뷰를 메모지에 기록하면서, 한국영화사 정리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창간호를 시작으로 해방 직전 발행호까지 영화와 관련된 기사와 광고를 빼놓지 않고 확인했고, 원로영화인들을 인터뷰한 것도 바탕이 됐다. <임자없는 나룻배>(1932)와 <춘향전>(1955)을 연출한 이규환 감독의 동숭동 낙산 자택을 찾아가 손님 대접으로 내온 설탕물 한 사발을 들이키며 일제 강점기 나운규와의 영화계 활동과 <나그네>(1937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지배 권력의 수탈에 맞선 민중 저항 담은 <춘향전>
▲지난 6월 세종도서관에서 안종화 선생에 대해 강연하고 있는 노만 평론가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영화 기자로 활동할 당시 실존주의와 네오리얼리즘 등의 영화담론이 유행하면서 노만은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이 계기가 됐다. 반공법 위반 논란이 생기며 용공 시비에 휘말렸지만 영화문법에 맞게 촬영된 수작이었다. 우리영화가 담아야 할 현실은 어떠해야 하는지, 한국적인 현실과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겨난 것이었다.
대학 강의를 하면서 그 고민은 정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노만이 한국영화의 본질을 저항으로 규정한 것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노만은 '한국문학의 본질이 끈기에 있다고 본다면 한국영화의 본질, 즉 한국영화에서의 한국적인 것은 저항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한국영화의 전환점으로 존재했던 <춘향전>을 예로 들었다.
<춘향전>의 텍스트는 단순한 청춘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넘어 한국 문학사 전반에 핵심을 이루는 연구대상이자 텍스트로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시대적 고찰과 사회상은 물론 신분 질서의 양상, 특히 작중에서 변학도로 대변되는 지배 권력의 폭정과 수탈, 이제 대한 민중의 저항이 핵심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1923년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를 시작으로 1935년 이명우,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에 만들어진 이규환, 1958년 안종화, 1961년 홍성기, 신상옥의 영화들은 각각 무성영화, 최초의 발성영화, 한국전쟁 이후 흥행작, 국내기술로 시도된 천연색 영화,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기록되었다.
이처럼 한국영화사의 주요국면마다 기술적 시도와 흥행을 이룬 춘향전은 한국영화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이 나운규의 영화 정신에서도 이어졌음을 물론이다.
노만은 10년 정도 대학 강의를 이어가면서 영화수출업에도 뛰어들어 1969년 이만희 감독 <만추>를 미국에 수출하기도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후 1970년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영화계를 떠나게 된다.
<영화사가 노만>에는 한국영화의 기점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오류를 확인하게 된 과정 등도 세세하게 담겨 있다. '월하의 맹세'를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봤으나 제작연도가 1921년이 아닌 1923년이라고 문제제기를 했고, 바로잡게 된 것이다.
이렇듯 오랜 시간 야인으로 있다가 영화인으로서 정체성을 다시 찾은 노만이 구술한 195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풍경은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이 많기에 연구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특히 한국영화의 정체성과 본질에 대한 고민은 후세에도 좋은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노만의 재등장 이후 그의 이야기를 구술채록해 최근 별도의 기록을 남겼다.
<영화사가 노만> 저자인 유창연 박사는 영화사연구자로 『안종화 「한국영화 40년 약사」』(공저, 두두북스, 2024), 『사탄탱고: 벨라 타르에 들어가기 앞서』(공저, 코프키노, 2025)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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