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영화 상영이 끝난 후 30여 명의 관객은 각자에게 영화가 준 의미를 함께 짚었다. 처음엔 서로 쉽게 입을 떼지 못했지만, 모두 영화 <세계의 주인>에서 자기 이야기를 찾았다.
영화는 열여덟 여고생 주인이 전교생이 참여한 서명운동을 홀로 거부한 뒤 의문의 쪽지를 받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주인이의 삶은 보통의 여고생과 비슷한 일상을 보내지만, 이유 모를 순간에 움찔거리기도 한다. 그럴때마다 주인을 둘러싼 사람들, 엄마와 동생 그리고 아빠와 친구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혼란스러워 하지만 주인 곁에 단단히 머무른다.
영화는 지난 10월 22일 개봉했지만, 드물게 장기 상영을 이어가며, 관객 16만 명(12월 11일 기준)을 돌파했다. 9일에는 윤가은 감독이 주목할 만한 활약을 펼친 여성 영화인들에게 주는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받았다.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 영화를 본 관객 중 누군가는 주인의 친구에, 누군가는 주인에게 그리고 누군가는 주인의 가족에게 이입했다. 한 관객은 영화 속 주인이 교장실에서 자기가 피해 생존자임을 밝히는 장면이 "반가웠다"고 말했다.
"주인이가 자기가 겪은 일을 어렵지만 입 밖으로 꺼내잖아요. 그게 사건을 정의하고 공론화하는 시작 같더라고요. 그 용기가 멋졌고, 또 주인이 곁에서 주인이 탓을 하기보다 사안을 이해하기 어려워도 그 곁에 있으려는 친구들, 가족들이 고마웠어요. 저 역시 친구들이 영화 속 주변인처럼 그렇게 곁에 있어 줬거든요."
서울강서양천여성의전화 활동가 '낮달'(활동명)은 영화의 감상을 전하며 '안전'을 재차 언급했다.
"주인의 세계에 등장하는 주변인 모두가 소중했어요. 자의든 타의든 자기가 겪은 폭력을 드러내게 하지 못하는 세상이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주인의 주변인들은 서로 '연결'을 통해 주인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안전지대'가 되어줘요. 내가 지금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게 정말 소중한데, 주인은 그 자리가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이 자리에 모인 관객들은 영화 속 '주인'이 강조한 대로 '누리가 아픈 걸 아프다고 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랐다. '누리(박지윤)'는 주인의 엄마가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이자 아동 성범죄자가 출소 후 동네로 돌아오는 걸 반대하는 서명을 주도하는 '수호(김정식)'의 동생이다. 팔이 다치고 목에 꼬집힌 자국이 선명하지만 좀처럼 '아프다'고 하지 않고, '괜찮다'고만 한다. 꾹 참는 것처럼 보이는 누리를 보는 주인의 마음은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한다"는 걸 영화 내내 반복해 말한다.
"처음에 괜찮다고만 하던 누리가 영화 후반 '아플 땐 아프다고 해야 한다'는 말을 하잖아요. '주인'의 다음 세대와 같은 '누리'의 변화를 보며 오열했어요. 그 말이 너무 반갑기도 하고요. 당연히 '폭력'이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폭력이 다가오고 내가 그 폭력을 경험하더라도 그다음을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니까요. 영화 속 '누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낮달)
모두가 '주인' 되려면...
▲'친족성폭력 우리가 멈춘다' 플래카드신나리
그의 말처럼 사회의 변화는 개개인의 노력만으로 달성되거나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법적, 제도적 장비와 보완이 필요한데, 이날 상영회는 '강서양천여전'이 지난 2일 친족이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저지른 성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 법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를 환영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본회의에서 통과된 법안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성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이다. 현행법은 13살 미만 아동 혹은 장애가 있는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해서만 공소시효(범죄를 저지른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공소를 제기할 수 없는 제도)를 적용하지 않는데, 그 적용 범위를 19살 미만 청소년까지 확대한 게 법안의 주요 내용이다.
상영회에 참가한 푸른나비(활동명) 역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내내 주장해 왔다. 그는 2019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폐지 청원을 올리고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공폐단단' 활동하고 있다. 2021년 2월 국회 앞 1인 시위를 시작해 같은 해 4월부터 광화문에서 '매마토(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의 줄임말)' 시위를 하고 있다.
푸른나비는 "친족 성폭력 자체가 사라지는 날을 꿈꾸지만, 영화 속 주인처럼 일상을 살 수 있는 생존자가 많아지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그러기 위해선 성년 피해를 포함한 공소시효 '전면 폐지'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국회에서 통과한 법은 19살 미만 미성년자에게만 해당하기에 19살 이상 피해에도 공소시효 폐지가 적용되려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푸른나비는 영화 <세계의 주인>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이 고민을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친족 성폭력은 나이에 의해 발생한 게 아니에요. 가부장제 가족 안의 권력관계 안에서 발생한 거죠. 그렇기에 가족 안에서 이를 문제제기 하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해요. 결국 '공소시효 전면 폐지'를 위해 투쟁을 계속 할 거예요. 영화 <세계의 주인>은 이 이야기를 또 한 번 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영화예요. 그러니 더 많은 분들이 보면서, 우리 사회 속 '친족 성폭력 피해'의 현실도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푸른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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