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을 든 소녀> 스틸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는 주제와 배경으로 관객에게 잊기 힘든 생채기 흉터를 새기려는 듯 차갑게 가라앉은 흑백 톤으로 시종일관 흘러간다. 20세기 초반, 전쟁의 음울함이 전 유럽을 장악한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발전되고 풍요롭던 지역이라곤 믿기 힘든 부도덕과 빈곤의 그림자는 다그마르 부인이 누누이 설파하고 카롤리네가 온몸으로 체험하던 시대상을 하이퍼 리얼리즘 수준으로 관객에게 간접 체험하게 만든다.
카메라는 철저하게 주인공과 그녀를 둘러싼 몇몇 주변 인물에게 집중한다. 주변 풍경은 때로는 흑백 화면이 제공하는 선명한 명암 대비로, 때로는 인물의 심리까지 꿰뚫어 보여주려는 듯 강조되는 표정을 더욱 부각하고자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조정된다. 선택과 집중이 확고한 연출 의도 아래 치밀한 배치로 작품의 성격을 확고히 각인시킨다. 자주 관객은 마치 당대 사회상을 고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집을 펼쳐보는 기분에 휩싸일 법하다. 그만큼 시대 고증과 화면 묘사가 찰떡 궁합을 선보인다.
그런 인상적인 촬영을 통해 감독은 어떤 이미지를 관객에 전하려 한 걸까? 구박과 냉대에 시달리던 가난한 여자는 사탕 가게의 마녀를 만나 포로가 된다. 익숙한 이야기다. 바로 '헨젤과 그레텔' 아닌가. 그녀를 구해줄 듬직한 기사도, 백마 탄 왕자님도 없다는 게 차이일 뿐. 처음에 주인공이 기대를 품었던 귀공자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실은 알고 보니 카롤리네가 겪게 된 불행의 원천은 그 왕자님이 속한 기득권 집단이 누리는 부와 권력의 대가였던 것. 당연히 구원자가 될 수 없는 운명이다. 오히려 진짜 구원은 그녀가 '괴물'이라며 멸시하고 내쫓던 누군가로부터 찾아온다. '미녀와 야수'가 따로 없다.
마치 그림 형제 동화집을 솜씨 좋게 연결한 것처럼 펼쳐지는 이 성인들의 잔혹 동화는 서사 구조로만이 아닌, 과감한 고전 차용 실험으로 완성된다. <바늘을 든 소녀>는 영화 속 시대 배경과 겹쳐지도록, 초창기 영화 전통에 헌사를 바치듯 당대 영화 사조와 특징을 21세기에 재도입한다. 독일 표현주의 사조라면 쉽게 떠올릴 법한 이미지, 화면 가득 채운 인물의 과장된 표정과 속을 알 수 없는 내면 묘사는 영화 도입부부터 필살기로 활용된다.
여기에 근대 유럽에서 널리 유행하던 '프릭쇼', 소수자의 육체적 제약과 기형적 면모를 돈벌이와 쾌락 대상으로 삼던 그로테스크한 풍토를 동화가 제시하는 교훈과 결합해 겉으론 말끔하게 굴러가지만, 위선으로 가득한 주류 질서에 경종을 던지려 한다. 그저 충격적인 실제 사건의 선정적 극화에 그치지 않고, 엑스레이로 투시하듯 시대의 위선을 속내까지 끄집어낸다.
사회적 '괴물'의 탄생과 주체적 여성의 탄생이란 시대적 징후
▲<바늘을 든 소녀> 스틸
그린나래미디어㈜
이는 그저 테크닉 차원이 아니라, 작품이 풀어내고자 하는 '괴물'화된 사회적 약자의 초상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기도 쉽지 않을 테다. 해당 사조가 탄생한 사회적 배경을 떠올리면 이 기법 활용이 명분과 효용을 동시에 잡으려 함을 금방 깨달을 법하다. 현대에 들어 과거엔 그저 공포와 추악함의 대상으로, 철저히 '타자'화하던 존재들의 재해석은 자연스레 뒤따른다.
영화 속에서 '괴물'은 그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바늘을 든 소녀>는 극도로 절제된 폭력과 범죄 묘사를 통해 선정적 이미지 소비를 단호히 배격한다. 그 대신에 신문 사회면에서 가십으로 팔리기 딱 좋은 흉악 범죄자를 어떻게 사회가 공모해 탄생하도록 조장했는가 형상화하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이 영화는 외형상은 괴물이지만 변장한 천사 vs. 천사의 얼굴을 한 괴물 vs. 천사도 악마도 될 수 있는 여자(들)이란 흥미로운 구도를 제시하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통해 관객을 깊이 있는 성찰로 이끈다. 디즈니가 현실의 고단함을 망각하는 판타지로 둔갑시킨 그림 형제의 전래동화가 가진 진면목과 이면의 고발은 <바늘을 든 소녀>에서 가장 두려움을 던지던, 생존을 위해 카롤리네가 잡던 바늘이 다른 용도로 전용되던 순간처럼 보는 이의 마음에 내려앉을 것이다.
<작품정보>
바늘을 든 소녀
The Girl with the Needle
2024|덴마크|드라마, 스릴러
2025.12.10. 개봉|123분|15세 관람가
감독&각본 마그너스 본 혼
출연 빅 카르멘 손네, 트린 디어홈, 베시르 제치르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공동배급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바늘을 든 소녀> 포스터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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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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