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금 영화인 줄 알았는데... 보고 나서 펑펑 운 이유

[리뷰] 영화 <윗집사람들>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관계를 지속한다는 건 삶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와도 같다. 수많은 책과 조언들은 열린 마음으로 살라고 쉽게 말하지만, 막상 현실의 관계 속에 들어가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된다. 특히 오래된 관계일수록 투명했던 물이 탁해지듯, 감정은 바닥으로 침전되고 서로는 서서히 소원해진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 침묵을 깨고 이해를 구하는 일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조금만 서로를 들여다보고 이야기하면 될 일인데, 긴 시간 동안 쌓인 앙금과 찌꺼기들이 시야를 가려 결국 관계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영화 <윗집사람들>은 겉보기에 19금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층간 소음과 엮어 흥미롭게 풀어낸다. 하지만 그들의 적나라하고 솔직한 대화들을 가만히 듣다 보면, 이 영화가 단순히 자극을 쫓는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것은 결국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가장 멀어져 버린, 우리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첫 번째 감정] 정아의 섭섭함

 영화 <윗집 사람들> 장면
영화 <윗집 사람들> 장면㈜바이포엠스튜디오

아내 정아(공효진)는 남편 현수(김동욱)에게 깊은 섭섭함을 품고 있다. 아니, 어쩌면 섭섭함조차 말라버린 무감정 상태일지도 모른다. 영화 초반, 그녀가 남편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건조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특별히 미워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아끼고 있다는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대화가 멈춘 그 자리에 섭섭함만이 덩그러니 남아 집 안을 채우고 있는 것만 같다.

정아가 윗집 사람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 것은, 어쩌면 그 고요한 섭섭함을 어떻게든 깨뜨리고 싶었던 무의식적인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식사 자리에서 윗집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무척이나 자극적이고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 충격적인 대화들 덕분에, 역설적으로 정아의 마음속 깊이 눌러왔던 섭섭함들이 겉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닫혀있던 정아의 마음을 두드린 건, 윗집 사람들의 무례함이 아니라 그들의 솔직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모든 것을 열어둔 윗집 사람들의 모습이, 굳게 닫혀 있던 정아의 마음 빗장을 억지로라도 열어버린 셈이다. 그렇게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쨌근 그녀는 마음 속의 섭섭함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두 번째 감정] 현수의 답답함

 영화 <윗집 사람들> 장면
영화 <윗집 사람들> 장면㈜바이포엠스튜디오

남편 현수의 내면 역시 꽉 막힌 답답함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감독으로서 작품을 구상하고 있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는 현실은 그를 옥죄어 온다. 하지만 현수는 그 고민을 아내인 정아와 나누지 않는다. 그저 혼자 삭히고, 꾹꾹 눌러담아 스스로 감당하려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정아에게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까칠하거나 장난스러운 태도로 본심을 감춘다. 그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보인다.

현수 역시 윗집 사람들의 기상천외한 19금 스타일의 대화를 들으며 황당해 하고, 급기야 주먹다짐까지 벌인다. 하지만 그 격렬한 충돌은 오히려 현수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겨내는 계기가 된다. 윗집 사람들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모든 감정과 욕망을 공유하는데, 정작 현수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채 혼자 끙끙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 대비된다.

현수의 방은 마치 동굴과도 같다. 그는 스스로 만든 동굴에 갇혀, 자신을 고립시키고 괴롭히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가 윗집 사람들에게 화를 낸 건, 어쩌면 그들이 가진 자유로움에 대한 반발심이자, 동시에 그 동굴에서 자신을 꺼내 달라는 위로의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답답함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았을 때, 비로소 그는 짐을 내려놓게 된다.

[세 번째 감정] 윗집 사람들의 긍정성

 영화 <윗집 사람들> 장면
영화 <윗집 사람들> 장면㈜바이포엠스튜디오

윗집에 사는 수경(이하늬)과 김 선생(하정우) 부부는 일반적인 시선으로 볼 때 분명 이상하다.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는 설정을 차치하고서라도,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묘한 긍정성이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꽤 많은 것을 투명하게 공유한다.

현수와 정아는 처음엔 그들을 이상하게 여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태도에 마음이 동요한다. 층간 소음 문제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결국 현수와 정아는 그들을 통해 '소통의 방식'을 배운다. 그것은 윗집 사람들처럼 성적으로 개방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속에 담아둔 섭섭함과 답답함을 썩히지 않고, 밖으로 꺼내어 이야기해도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의미다.

윗집 특유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데서 온다. 영화 내내 그들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대신, 웃으며 이야기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 어쩌면 그 부부의 사이가 좋았던 건, 자극적인 취미 때문이 아니라 이런 투명한 소통 때문이 아니었을까.

발칙한 소동 끝에 남은 따뜻한 위로

영화는 성적인 코드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껍질을 까고 보면 아주 보편적인 부부 사이의 감정과 관계 회복에 대한 내용이다. 결말부가 다소 상담 영화처럼 교훈적으로 흐르는 느낌도 있지만, 이 발칙하고 소란스러운 이야기를 따뜻하게 매듭짓기 위한 감독의 어쩔 수 없는, 그러나 다정한 선택으로 보인다.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가 몰입감을 높이고, 하정우 감독 특유의 맛깔스러운 대사들이 영화의 리듬을 살린다. 자극적인 소재에 거부감만 없다면, 권태로움 속에 갇힌 부부나 연인들이 한 번쯤 보고 대화를 나눠볼 만한 영화다. 결국 중요한 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느냐' 일 테니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와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윗집사람들 19금 부부관계 하정우 층간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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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영화와 시리즈가 담고 있는 감정과 생각을 전달합니다. 브런치 스토리와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영화에 대한 생각을 전달하고 있어요. 제가 쓰는 영화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저의 브런치 스토리에서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같이 영화가 전달하는 감정과 생각을 나눠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