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과 전봉준, 두 사람은 신분질서가 엄격한 조선시대에 태어나 기성 체제의 모순에 맞서 밑바닥 백성들의 절망과 분노를 대변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어떻게 반항적인 '의적'의 대명사로, 혹은시대를 앞서간 '혁명가'로 남으며, 낡고 부패한 세상에 맞서 백성들이 만들어낸 '저항의 불꽃'을 상징하는 존재가 됐을까.
9일 방송된 tvN STORY < 벌거벗은 한국사2 >에서는 '분노한 백성들이 만든 저항의 불꽃, 임꺽정과 전봉준' 편이 그려졌다.
임꺽정은 조선 11대 중종 시절, 경기도 양주 일대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조선의 신분제에서도 가장 지위가 낮은 백정(천민) 출신이었다. 민담에서는 임꺽정의 외모가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체모가 풍성했다고 전해진다.
임꺽정이 성장하던 시기는 13대 명종 재위기로, 당시 조선은 왕의 모후인 문정왕후와 측근세력들이 권력을 농단하면서 부정부패와 사회적 모순이 만연하던 시절이었다. 많은 힘없는 백성들은 양반들의 억압과 탈에 고통을 받아야했다.
양반의 횡포
▲벌거벗은한국사2임꺽정과 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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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백성의 삶을 살던 임꺽정은 황해도 일대에서 갈대를 구해 생활도구를 만드는 일로 생계를 꾸렸다. 하지만 황해도 일대가 농경지로 개발되면서 기존에 주인 없던 땅에도 양반들이 권리를 주장하며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생계가 막막해진 임꺽정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무리를 모아서 결국 도적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임꺽정의 근거지가 된 황해도는 교통의 요지로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는 수많은 교역품이 드나드는 지역이었고, 험준한 산세를 갖춰 숨을 곳이 많다는 장점도 있었다. 임꺽정의 무리는 양반집을 포함하여 관청까지 습격하며 그 위세를 떨쳤다. 이들은 평시에는 도적질을 하고 난후, 백성들 틈으로 은신하여 정체를 감췄다. 관군은 신출귀몰한 임꺽정의 무리를 쫓는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오랫동안 양반들의 수탈에 원한을 품고 있던 백성들은 임꺽정을 '의적'으로 칭송했다.
또한 임꺽정은 변장에도 능하여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관리를 사칭하여 관청을 드나드는가 하면, 자신을 추격하던 포도관을 살해하기도 했다. 임꺽정의 세력은 근거지인 황해도를 넘어서 평안도와 강원도, 경기도, 심지어 수도 한양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약탈과 도망을 거듭했다. 임꺽정의 악명이 높아지면서 조정의 압박과 포상에 눈이 먼 지방관들은, 억울한 백성들을 생포하고 고문하여 '가짜 임꺽정'으로 만들어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일이 속출하기도 했다.
임꺽정의 위세가 날로 높아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 조정은 임꺽정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린다. 하지만 임꺽정을 잡기 위하여 투입된 관군은 오히려 임꺽정의 매복 작전에 휘말려 크게 패퇴하고 만다. 일개 도적단이 국가의 정규군과 맞붙어서 대승한 것은 조선의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임꺽정은 이후로도 수년간 위세를 떨쳤고, 조선 조정에서는 임꺽정의 무리를 더이상 일개 도적떼가 아니라 국가 체제를 흔드는 국적(國賊, 반란군)으로 규정할만큼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그런데 임꺽정은 실제로도 정말 의적이었을까. 사실 정식 사서인 실록에는 임꺽정이 백성을 위한 의적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명종실록>이나 <대동야승>에 따르면, 임꺽정은 성격이 잔혹하여 도적질에 항거하거나, 관군에 협력하여 자신들의 종적을 누설한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무자비한 보복을 가했다고 한다. 임꺽정에 협력한 백성들은 대부분 그들의 위협이 두려워서 어쩔수 없이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실제의 임꺽정은 말 그대로 잔인한 '생계형 도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임꺽정은 토벌군의 거듭된 추격을 받고 쫓기면서 세력이 점점 약해지다가 1562년 황해도 인근에서 결국 체포된다. 한때 임꺽정의 참모였던 서림이 체포된 후 배신하여 관군의 앞잡이 역할로 돌아서면서 임꺽정 일당을 추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다만 사로잡힌 임꺽정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오늘날 의적 임꺽정의 이미지는 민담을 거쳐 대부분 후대의 소설과 드라마를 통하여 윤색된 것이다. 특히 1928년 일제강점기 시절에 홍명희가 쓴 <임꺽정전>에서는 일제에 저항하는 민중의 염원을 담아 임꺽정이 의적으로 재해석됐다. 밑바닥 인생이던 임꺽정이 억압적인 지배질서에 맞서 싸우는 소설 속 활약상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되면서, 오늘날까지 긍정적인 임꺽정의 이미지로 이어진 것이다.
몰락한 양반가 출신의 후손
▲벌거벗은한국사동학농민혁명tvNSTORY
임꺽정의 시대로부터 약 330여년이 흐른 1890년대, 조선 사회 체제의 모순에 분노하는 또 한명의 특별한 인물이 등장한다. 전봉준은 1855년 전라북도 고부(오늘날의 정읍) 지역에서 한 몰락한 양반가 출신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당시는 조선 말기로 지배층의 타락과 부정부패로 사회가 한창 혼란하던 시기였다. 전봉준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중심 대안 학문이자 사상을 표방하던 '동학(東學)'에 깊이 심취하여 호남 지역의 동학 지도자로 활동했다.
당시 지방관이었던 고부군수 조병갑은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여 '만석보'를 만들고 백성들에게 법에도 없는 세금을 매기는 등 무자비하게 수탈과 횡포를 일삼았다. 백성은 글을 아는 전봉준의 부친에게 대신 조정에 올리는 탄원서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된 조병갑은 전봉준의 부친을 끌고 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곤장을 때리며 보복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다.
분노한 전봉준은 1894년 1월, 무려 1천여명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고부 민란'을 일으키고 관아를 점령한다. 농민군은 비록 조병갑은 놓쳤지만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고 빼앗긴 곡식들을 모두 농민들에게 되돌려주며 민심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당황한 조선 조정은 탐관오리인 조병갑을 파직하고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조정이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가 오히려 동학을 탄압하고 고부 농민들을 잡아들이는 횡포를 부리자, 분노한 전봉준은 1894년 3월 두번째 농민 봉기를 일으킨다.바로 '동학 농민 혁명'의 시작이었다.
전봉준은 작은 체구에도 당당한 성품으로 '녹두장군'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가 제시한 목표는 수도 한양까지 진격하여 당시 조선의 국왕인 고종에게 직접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이는 일시적인 봉기나 반란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오랫동안 신분과 계급질서가 엄격하게 유지되어왔던 왕정 사회에서, '민중들이 처음으로 왕권에 직접 문제제기를 시도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농민군은 관군을 연이어 격퇴하고 전주성까지 함락했다. 농민군의 진격이 계속될수록 참여하는 백성들의 숫자는 점점 더 불어났다. 두려움에 휩싸인 조선 조정은 자력으로 농민군을 진압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다. 이에 조선을 넘보고 있던 일본까지, 청나라를 견제하고 자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멋대로 파병을 결정한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조정이 외세까지 끌어들인데 큰 충격을 받았다. 자칫 국가적인 침략으로 이어질 상황을 우려한 전봉준은, 결국 한발 물러나 5월 7일 조정과 '전주화약'을 맺으며 진군을 중단하고 농민군을 잠시 해산했다.
하지만 농민군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청군과 일본군은 물러가지 않았다. 그해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전봉준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다시 농민군을 일으킨다. 당시 각지에서 호응하며 가세한 동학 농민군의 숫자는 약 4만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본군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은 조선의 개화파들은 농민군이 한양을 점령할 것을 두려워했다.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은 동학 농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에 나섰다. 자국의 백성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외세를 끌어들이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10월 23일, 공주에서 조일연합군과 동학농민군간의 '공주 전투'가 벌어진다. 농민군은 40배에 달한 압도적인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개틀링건(기관총)과 대포 등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조일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하며 수많은 이들이 학살당했다.
일본은 후환을 제거하기 위하여 모든 동학교도들에 대한 철저한 살육을 지시했다. 농민군은 전력을 재정비하여 11월 9일 '우금치 전투'에서 최후의 항전을 펼쳤으나 또다시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고 대패한다. 도피하던 전봉준은 결국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되었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사형당하며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한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외세를 몰아내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농민군의 희생은, 한반도에 본격적인 반봉건- 반외세 운동의 정신을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 전봉준은 그가 꿈꾼 세상을 직접 보지 못했으나, 그가 남긴 저항의 불씨는 이후 계속 민중들의 가슴을 통하여 이어지며 오늘날의 역사를 바꾸는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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