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홋카이도(북해도)는 '아시아의 겨울왕국'으로 불리는 섬으로, 오호츠크해의 유빙과 원시림이 펼쳐진 대자연, 겨울의 하얀 설국으로 유명하다. 2024년 기준으로 약 4900만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했을 만큼 세계적인 관광명소다.
하지만 홋카이도의 이면에는 비극의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 수천 년 동안 홋카이도를 터전으로 살아왔던 본래의 주인인 아이누족은, 일본의 침략 이후 노예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또한 홋카이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기지로 이용당하며 비극적인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8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홋카이도, 관광지로 포장된 제국주의의 산물'편이 다뤄졌다.
변방의 땅, 훗카이도
▲<벌거벗은 세계사> 중 한 장면
tvN
홋카이도는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의 섬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본토와는 바다로 불과 20km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지금과 달리 과거의 홋카이도는 본토와의 단절과 혹한의 기후 등으로 인하여 주목받지 못하는 '변방의 땅'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홋카이도에 가장 먼저 터전을 세운 것은 12-13세기경에 정착한 아이누족이었다. 아이누는 바로 '인간'이라는 뜻으로 홋카이도의 원주민을 뜻하는 '선주민'으로 불렸다. 아이누족은 흰 피부와 풍성한 체모를 지녔으며 일본인들과는 외모와 언어, 문화 등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과거 일본인들은 아이누족을 에조(오랑캐)라고 부르며 멸시했고, 홋카이도는 주인 없는 땅으로 취급받았다.
일본이 홋카이도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전국시대였다. 긴 전란으로 생계를 잃은 평민들과 무사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홋카이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7세기 들어 일본의 전국시대가 끝나고 1603년에는 '에도 막부'가 들어선다. 홋카이도 최남단에 있는 마츠마에 가문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홋카이도 일대를 지배하며 세력을 키웠고,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에이야스에게 실권을 인정받아 '마츠마에 번'을 수립한다.
마츠마에 번은 중앙정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홋카이도를 사실상 통치했다. 이들은 아이누 부족들과는 뚜렷한 상하관계를 구축하며 홋카이도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강화했다. 아이누족은 일본인들에게 노예 취급을 당하며 강제로 착취를 당했다. 이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아이누들은 진압되고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1807년에 들어서면 에도 막부가 강대국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맞서 홋카이도를 막부 직할로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한다. 막부는 이투루프 섬에 홋카이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알리는 선언문을 담은 비석을 세웠고, 하코다테 지역에 별모양의 성곽으로 유명한 서양식 근대 방어기지인 '고료가쿠 요새'를 건설했다.
미국의 등장
▲벌거벗은세계사홋카이도tvN
홋카이도의 근대화를 더욱 촉진한 본격적인 계기는 미국의 등장과 개항요구였다. 1854년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함대가 에도만에 나타나 일본의 개항을 요구한다. 양국은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최초로 하코다테를 개항하는데 합의한다. 하코다테가 '일본 최초의 국제무역항'이 되면서 다양한 서양 선박들이 드나들고 외국 상인과 선교사, 기술자들이 일본에 모여들면서 지역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
1868년,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가 수립되는 '메이지 유신' 시대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정세는 또 한 번 요동친다. 천황 중심의 신정부와 기존 막부 지지 세력 간 1년간의 보신전쟁(1868-1869) 끝에 신정부가 승리를 거두며 일본의 정권을 장악한다.
보신전쟁의 대미를 장식하는 '하코다테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홋카이도였다. 전쟁에서 패한 막부의 잔여세력이 홋카이도에서 몰려와 고료가쿠 요새에서 농성했으나 결국 정부군에 의하여 진압당한다. 막부 세력이 세운 에조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260년간 이어져 온 에도 막부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일본은 마침내 홋카이도 일대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일본 정부는 1869년부터 기존의 에조치(오랑캐의 땅)로 불리던 지명에서 '홋카이도(북해도)'라는 명칭을 공식 사용하며 이 지역이 일본의 땅이라는 의미를 강화했다. 이는 '북쪽의 바닷길을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로. 일본이 앞으로 해양제국으로 뻗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표현이었다 . 1873년에는 삿포로에 중앙정부 직속관청인 '개척사'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홋카이도 개발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또다시 가장 큰 희생을 당한 것이 본래 홋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족이었다.일본은 식민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홋카이도 구토인 보호법'을 제정했다. 겉으로는 선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아이누의 토지와 문화를 빼앗고 일본식 생활을 강제한 동화정책법이었다.
아이누인들의 생계수단인 사냥과 어업은 금지되었고 강제로 농사를 지을 것을 강요당했다. 또한 아이누의 언어와 신앙, 의혹, 생활양식 등도 모두 금지되며 일본식 생활을 강요하는 전통문화 말살이 자행됐다. 일본 정부는 1869년에는 삿포로 신사(현 홋아키도 신궁)을 건설하고 지역민들에게 참배를 강요하며 사실상 아이누를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강행했다.
그리고 이는 훗날 일제강점기의 한반도나 일본의 식민지들에서 나타난 통치 양상과 동일하다. 훗날 일본식 식민통치의 첫 모델이 된 것이 바로 홋카이도와 아이누족이었다.
농업의 근대화
한편 홋카이도 개척의 영향으로 이 지역에는 밭농사와 목축업을 주력으로 농업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 1876년에는 삿포로 농학교(현 홋카이도 대학)가 설립된다. 삿포로 농학교는 홋카이도 농업 혁신의 중심이자, 지역 개척의 핵심 교육기관 역할을 하며 일본 농업의 근대화를 이끄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는 평가다.
홋카이도 특유의 기후를 감안하여 일본식 벼농사보다 적합한 보리농사가 추진되면서 이를 계기로 맥주산업이 발전했다. 오늘날까지도 '삿포로 맥주'는 지역을 상징하는 대표 산업제품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낙농업의 발전은, 홋카이도가 양질의 우유 생산을 기반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디저트 왕국'으로 발전하게 됐다.
동시에 홋카이도는 단순한 개척지를 넘어 '일본이 제국주의로 성장해나가는 최초의 실험장'이기도 했다. 홋카이도는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일본이 연달아 전쟁을 거듭하면서 점차 중요한 군사거점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다양한 군수물자의 재료로 쓰이는 석탄이 일본에서 가장 많이 매장되어있는 지역이 홋카이도이기도 했다. 전시에 홋카이도의 공장들은 무기와 군수 보급품을 생산하는 제작소로 바뀌었다.
또한 일본은 자국 광부들이 전쟁터로 끌려 나가며 석탄채굴을 위한 인력이 부족해지자, 조선인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노동을 시키기도 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15만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가서 혹독한 노동과 인권착취를 당했다. 이 시기에 기록된 사망자만 2800여명, 실제로는 1만여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면서, 일본 내 전시 산업거점이자 군수공장들이 모여있던 홋카이도는 미국의 우선순위 공격 표적이 됐다. 공장들이 대거 몰려있던 홋카이도의 공업도시였던 무로란 일대는 미군의 폭격으로 시설이 붕괴되고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양산하며 큰 타격을 입어야 했다.
한때, 처참한 페허로 전락한 홋카이도는 어떻게 오늘날의 '관광도시'로 다시 부활할 수 있었을까. 1950년대 일본이 '경제 부흥기'에 돌입하면서 홋카이도의 본격적인 재건도 시작됐다. 전후의 일본 정부는 제국주의로 대표되는 어두운 과거사를 감추기 위하여 홋카이도를 '개척의 로망' 이미지로 포장하려고 했다.
1972년에는 홋카이도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삿포로 동계올림픽'이 개최된다. 이 대회는 앞서 치러진 1964년 도쿄올림픽과 함께,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 일본의 고도 성장기를 대표하는 국가적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일본 정부는 1966년 동계올림픽 개최 확정 이후 불과 6년 만에 1800억 엔을 쏟아붓는 천문학적 투자로 개최지 삿포로를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일본은 '척박한 개척정신의 땅'이라는 콘셉트로 홋카이도만의 '낭만 서사'를 설계했고, 설경과 겨울스포츠를 대표되는 관광도시로서의 매력을 부각시켰다. 또한 전통문화의 재건을 내세우며 차별과 탄압속에 잊힌 선주민 아이누 문화의 복원사업에도 착수했다.
동계올림픽 이후 홋카이도는 높아진 국제적인 인지도와 함께 겨울 관광지로서의 기반이 마련된다. 또한 지역을 대표하는 '삿포로 눈축제'가 주목받으면서 스키 리조트, 온천 여행 등 다양한 관광상품이 개발된다. 쇠락한 공장지대였던 홋카이도의 무로란 일대 역시 재설계 되면서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12대 공장 야경도시로 부활했다. 국가 자원의 체계적인 관광 정책 추진과 인프라 개선을 거쳐 2019년에 이르면, 홋카이도는 외국인 관광객만 790만을 돌파하는 일본 대표 관광지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오늘날의 홋카이도는 식민통치와 전쟁의 아픔을 겪었던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때는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변방에서, 개척 시대를 거치며 제국주의의 산물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전 세계가 사랑하는 겨울 대표 관광지로 거듭났다. 동시에 홋카이도가 거쳐온 파란만장한 시간 이면에는 많은 잊혀진 이들의 희생과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되새겨야 할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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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카이도'가 아시아의 겨울왕국으로 부활한 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