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퀴즈정경호
TVN
"저도 같은 길을 걸으면서 이제는 아버지가 하신 일이 참 '외로운 직업'이었다는 게 이해가 가더라. 수장(연출자)이라는 역할이 참 어렵다. 드라마 현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질문을 하고, 모든 배우에게 디렉션을 주고, 모든 스태프를 챙겨야 한다는 것. 어릴 때는 아버지에게 서운함이 있었는데, 나의 투정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어릴 때 아빠하면 떠오르는 건, 늘 손에서 대본을 놓지 않고 몰입하던 모습이었다. 저도 그런 아빠를 닮았는지, 늘 대본을 갖고 다니고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됐다."
12월 3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배우 정경호가 출연했다.
정경호가 교도관, 형사, 의사, 노무사 등 '까칠한 성격을 지닌 전문직 캐릭터'를 연기하기만 하면 그 작품은 대박이 난다는 징크스가 유명하다. 신작인 tvN 드라마 <프로보노>에서는 출세만 쫓던 속물 인플루언서 판사에서 공익변호사로 변신하며 또다른 전문직 연기에 도전한다.
정경호는 "생각해보니 22년을 연기했는데 그중 10년 이상을 까칠하고 날카로운 연기들을 연속적으로 했더라"고 돌아보며 "실제의 저는 까칠한 편은 아닌데 예민함은 있는 것 같다. 연기를 할 때 늘 대본을 옮겨적은 노트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데 그게 없으면 예민해진다"며 미소를 지었다.
"동화책보다 드라마 대본이 많았다" 스타 PD의 아들이 배우가 되기까지
널리 알려진 대로, 정경호의 부친은 <목욕탕집 남자들> <내 남자의 여자> <엄마가 뿔났다> 등, 김수현 작가와 함께 콤비를 이루며 수많은 '국민드라마'를 만들어낸 스타 연출가 정을영 PD다. 아들 정경호가 배우의 길을 걷는 데도 아버지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어릴 적에 집에 동화책보다 드라마 대본이 더 많이 있었다. TV에서 이순재, 강부자 선생님 같은 분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대본으로 본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어느 순간에는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더라. 어릴 때부터 저의 좋은 버릇이라고 한다면 남들의 연기를 열심히 보는 편이다. 아버지의 영향 덕분에 대본과 영상 모니터링이 자연스러워졌다."
정작 정을영 PD는 정경호가 배우의 길을 걷는 것을 만류했다고. 아들이 굳이 자신과 같이 힘든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정경호는 아버지에게는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몰래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원서를 넣어 합격했다. 정 PD는 몇 달이 지나서야 뒤늦게 소식을 알았다고.
"몇 달 동안 아버지와 사이가 서먹했다. 어느 날 아직 서로 감정이 썩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 말도 없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저를 불러세우더니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아빠라고 생각하고 나를 향해 뛰어와보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카메라로 촬영하듯 손으로 렌즈를 만들어서 눈에 대고 지켜보고 계셨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아빠에게 달려가 와락 끌어안았다. 그때 이제 서로 마음이 조금 풀렸다."
정경호는 2003년에는 아버지의 전 직장인 KBS 공채 탤런트 시험에 지원하여 무려 200대 1의 경쟁률을 뜷고 당당히 합격하며 정식으로 배우의 길에 입문하게 된다. 데뷔 1년 후인 2004년에는 출세작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만나게 된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미사 폐인' 신드롬을 일으킨 이 작품에서, 정경호는 서브남주이자 톱스타 '최윤' 역할을 맡아 처음으로 대중의 눈도장을 받게 된다. 당시를 회고하며 정경호는 "너무나도 소중했던 순간"이라고 <미사>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그런데 당시 신인이었던 정경호에게는 스스로의 연기가 아직 부족함을 돌아보게 만든 계기가 있었다. <미사> 8회까지만 해도 정경호는 주연급이자 적지 않은 출연 분량에도 불구하고 바스트 샷(근접 촬영)이 전혀 없었다고.
"'왜 나는 가까운 얼굴이 안 나올까?' 감독님에게 여쭤보지 않아도 알 것 같더라. '연기를 못하니까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 앉아서 늘 지난 방송을 돌려보며 연기공부를 했다. 다음날 촬영할 것보다, 전날 '연기를 왜 그렇게 했지'를 더 생각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현장에서는 대사를 미리 다 외우고 대본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또한 상대 배우의 리액션까지 항상 두세 가지 버전으로 생각하며 준비했다."
본인의 부족함을 깨달은 정경호는 절치부심하며 연기력을 키우기 위하여 노력했다. 신인 시절부터 정경호는 만일 변호사 역할을 맡는다고 하면 변호사 관련 작품은 모조리 섭렵하는 식으로 자신만의 연기공부 노하우를 꾸준히 실천해오고 있다. 정경호는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어떻게 했을까를 참고하며 '나만의 것'을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배우 인생의 전환점
▲유퀴즈정경호TVN
이후 정경호는 공백기 없이 매년 1~2편씩 꾸준히 연기활동을 이어나가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데뷔 13년 차인 2017년에는 대표작인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교도관 '준호' 역할을 만나면서 배우 인생의 또다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정경호는 '내가 이 드라마를 해야 하는 8가지 이유'를 직접 작성하여 신원호 감독과 이우정 작가에게 보여준 일화는 유명하다. 사실 제작진은 처음에는 항상 주연만 맡아왔던 정경호의 캐스팅을 부담스러워하여 고민했다고 한다.
"제가 신원호 감독과 이우정 작가의 팬이었다. 그런데 저를 처음 보고는 왜 왔냐는 듯한 표정을 짓더라. 꼭 출연하고 싶어서 저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어떤 역할이든지 해보겠다고 사정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내가 왜 준호 역할을 해야하는지 편지를 썼다. 준호의 사연에 제가 살아왔던 과정을 써서 묘하게 매치를 했다. 그 정도로 그분들과 함께 꼭 작품을 하고 싶었다."
배우의 열정과 간절함에 마음이 움직인 제작진은 결국 준호 역에 정경호를 캐스팅했고 이는 신의 한 수가 됐다. 정경호는 후속작인 <슬기로운 의사생활>에도 냉철한 매력의 의사 준완 역으로 출연하며 <슬빵> 시리즈의 간판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라이프 온 마스>에서는 형사, <일타스캔들>에서는 학원강사 역할로 출연하여 연이어 성공을 거두면서 '대한민국 대표 전문직 배우'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된다.
정경호가 지금도 대본을 누구보다 꼼꼼히 연구하고 필사하는 습관은 바로 아버지인 정을영 PD에게서 물려받았다. 하지만 정경호는 아버지와 같은 업계에 종사하고 있음에도, 막상 일적으로는 서로의 영역에 대해서는 조언이나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신 작품이 끝날 때마자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부자가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정경호가 출연했던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공연시간만 9시간에 이르는 장편임에도 정 PD는 아들이 나오는 작품을 무려 5번이나 관람하기도 했다. 정 PD는 아들의 연극을 감상한 뒤 보낸 메시지에서 "40년 넘게 연출했어도 빛난다는 평은 못 들었는데, 가슴이 뿌듯하게 울렁인다. 그 빛남을 녹슬지 않게 갈고 닦아주시게"라는 따뜻한 격려를 전하며 정경호를 뭉클하게 했다.
"아버지가 무대에 서 있는 제 모습이 좋으셨나 보다. 40년 넘게 드라마 감독을 하셨는데, 아들이란 놈이 탤런트 된다고 했을 때 황당하셨을 거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나, 피는 못 속이더라. (웃음)"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마치고 정경호는 아버지 정을영 PD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체험했던 추억을 회상했다. 정경호는 "성인이 되고 나서 아버지가 20여 일을 함께 있었던 기억이 너무 좋았다. 아버지를 더 잘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저한테는 굉장히 소중한 기억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순례길을 걷던 중 정 PD는 "경호야, 우리가 이 길을 또 걸을 수 있을까. 나중에 네가 아들과 오면 아빠 생각이 많이 나겠지"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감성적인 성격의 정 PD는 최근에도 가끔씩 아들을 걱정하는 다정한 문자를 보내주고, 정경호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접할 때마다 뭉클한 감동을 느끼면서 기운이 난다고.
"어릴 적에는 솔직히 아버지의 직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드라마 감독님들은 집을 일 년에 7~8개월씩 오랫동안 비우는 시간이 많았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랑 오랜 시간 같이 있지 못한 데 서운함이 있었다. 그런데 제가 배우가 되고 20년간 많은 감독님들을 만나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힘든 일을 오랫동안 하셨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들이 많더라."
세월이 흘러 이제 정경호는 스타 PD였던 아버지의 그늘을 뛰어넘는 톱배우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정경호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아버지가 연출하는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많이 쉬셨으니까 이제 일하셔야죠(웃음). 빨리 좋은 작품으로 같이 일하고 싶은 아들의 꿈을 이뤄주세요. 상상만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서로에게 잊지 못하는 선물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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