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손예진, 정우성 주연의 멜로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를 연출했던 이재한 감독은 2010년 조금 뜬금없이 전쟁영화를 차기작으로 들고 나왔다. 한국전쟁 6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영화 <포화속으로>였다. 보이그룹 빅뱅의 탑을 비롯해 권상우, 차승원, 김승우 등이 주연을 맡은 <포화 속으로>는 2010년 6월에 개봉해 전국 338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에 성공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10년에는 지상파 방송국에서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만든 드라마 두 편이 방송됐다. MBC에서는 <천국의 계단>을 만든 이장수 감독과 <개와 늑대의 시간>을 만든 김진민 감독이 공동 연출하고 소지섭과 김하늘, 윤계상, 최민수 등이 출연한 <로드 넘버 원>을 선보였다. 하지만 MBC 수목드라마로 방송된 <로드 넘버 원>은 <제빵왕 김탁구>라는 엄청난 강적을 만나 한 자리 수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KBS에서도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으로 6·25 전쟁 배경의 드라마를 제작해 방송했다. 주로 대하사극이 편성되면서 중·장년층 시청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는 KBS 1TV의 주말 시간대를 할애했고 1990년대부터 KBS 대하사극을 이끌었던 두 기둥 최수종과 이덕화 배우가 나란히 주연을 맡았다. 6.25 전쟁에 참전한 부대원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참사를 잘 표현한 KBS의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전우>였다.
▲KBS에서 제작한 한국전쟁 6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전우>는 전쟁의 참상을 실감나게 표현하며 호평을 받았다.
<전우> 홈페이지
KBS 연기대상 4회에 빛나는 '시청률의 제왕'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장년배우가 됐지만 최수종은 1987년 <사랑이 꽃피는 나무>로 데뷔했을 당시만 해도 많은 소녀팬들을 거느리던 '청춘스타'였다. 최근엔 영화에 거의 출연하지 않지만 최수종은 1990년대 초반까지 <있잖아요 비밀이에요>와 <너에게로 또다시> <별이 빛나는 밤에>같은 청춘 영화에 많이 출연했고 1987년에는 KBS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을 진행하기도 했다.
1992년 고 최진실과 호흡을 맞춘 트렌디 드라마 <질투>로 본격적인 스타배우로 도약한 최수종은 MBC에서 <아들과 딸> <파일럿>을 연속으로 히트 시키며 전성기를 누렸다. 1995년 KBS 일일드라마 <바람은 불어도>에 출연한 최수종은 1996년 <첫사랑>을 통해 시청률 조사가 시작된 1990년 이후 역대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첫사랑>에는 데뷔 초의 차태현과 송혜교도 조·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렇게 주로 현대극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최수종은 2000년 4월부터 2002년 2월까지 200부작으로 방송된 대하사극 <태조 왕건>에 출연하면서 이덕화와 유동근의 뒤를 잇는 KBS의 '사극에이스'로 등극했다. 사극 드라마 역사상 최초로 후삼국시대를 다룬 <태조왕건>은 최수종을 비롯한 베테랑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허준>에 이어 역대 사극드라마 시청률 2위(60.5%)를 기록했다(닐슨코리아 시청률 기준).
최수종은 2000년대 이후 주로 사극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태조왕건> 종영 후 3개월 만에 방송된 <태양인 이제마>는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2004년 장보고를 연기한 <해신>이 31.7%, 2006년에는 <대조영>이 36.8%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자존심을 되찾았다. 2010년에는 한국전쟁 6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전우>에서 소대장 역할을 하는 이현중 일등중사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최수종은 2012년 <대왕의 꿈>에서 태종 무열왕을 연기했고 2016년에는 KBS 시사 교양국에서 제작한 <임진왜란1592>에서 이순신 장군 역을 맡았지만 기대만큼 큰 반향을 불러오진 못했다. 하지만 최수종은 2018년 오랜만에 출연한 현대극 <하나뿐인 내 편>으로 49.4%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시청률 제왕'의 위용을 회복했고 2023년에는 <고려거란전쟁>을 통해 KBS 연기대상에서 통산 4번째 대상을 수상했다.
반공주의 대신 전쟁의 참혹함 강조한 드라마
▲2000년대 이후 사극에 주로 출연했던 최수종은 <전우>를 통해 한국전쟁에 휘말린 이현중 일등중사를 연기했다.
KBS 화면 캡처
<전우>는 1975년과 1983년에 이미 두 번이나 KBS에서 제작 및 방영된 적이 있는 드라마다. 하지만 1975년작과 1983년작 모두 군사정권 시절에 제작된 드라마였기 때문에 '반공'의 색채가 강할 수밖에 없었고 제작 환경도 열악하던 시절이라 미국의 전쟁 드라마 장면을 모방하는 등 완성도가 썩 높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2010년에 제작된 <전우>는 '격세지감'이 느껴질 만큼 드라마의 퀄리티가 매우 높아졌다.
<전우>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6일 앞둔 2010년 6월 19일에 첫 방송을 시작했을 만큼 KBS에서 공을 들여 편성한 대작 드라마였다. 하지만 같은 시기 2010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면서 <전우>는 졸지에 SBS에서 독점 중계권을 따내며 사활을 걸었던 월드컵과 경쟁을 벌였다. <전우>는 최수종이 출연한 다른 사극들처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방영 기간 내내 꾸준히 15% 내외의 준수한 시청률을 유지했다.
<전우>는 6·25 전쟁에 참여한 이현중(최수종 분) 부대 소속 부대원들이 평양 점령부터 북진, 중공군의 역습, 흥남 철수작전, 1·4 후퇴 등을 치르는 시점에서 겪는 전쟁의 참상을 다룬 드라마다. 많은 제작비와 큰 규모,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며 제작 당시부터 '한국판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불리기도 했다. 물론 홍보 포스터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전쟁의 비극을 잘 담아내며 호평을 받았다.
<전우>는 남한의 시선으로 만든 한국전쟁 드라마였고 1970년대 드라마를 리메이크했기 때문에 반공 드라마 또는 영웅 스토리로 흘러 갈 우려가 컸다. 하지만 <전우>는 등장인물들의 영웅담 대신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병사들의 몸부림과 그 속에서 쌓여가는 전우애를 집중 조명했다. 최수종과 이덕화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부대원 개개인의 서사를 자세히 보여준 점도 <전우>가 가진 미덕이었다.
<전우>는 극적인 스토리와 스펙터클한 연출로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적지 않은 설정 구멍과 고증 오류로 날카로운 눈을 가진 '밀리터리 덕후'들에게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한국전쟁 시기에 없었던 군사 장비들이 드라마 속에 등장했고 최수종과 이태란의 러브라인 역시 전쟁드라마와 어울리지 않았다는 평가. 여기에 인민군의 빗발치는 총알이 주인공 분대만 피해가는 장면도 적지 않았다.
작전 성공시키고 무공훈장 추서 받은 해병대원
▲작전 수행 도중 북한군에게 전사한 해병대원 최단영은 휴전 후 언니와 함께 무공훈장을 추서 받는다.KBS 화면 캡처
사실 이덕화 배우는 같은 시기 SBS에서 제작한 창사 20주년 대하드라마 <자이언트>에 출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덕화 배우는 한국전쟁 60주년 드라마 <전우>에 높은 관심을 표명했고 같은 시기에 두 지상파의 대작드라마에 동시에 출연했다. 이 덕분에 2006년 <대조영>에서 원수지간으로 나왔던 최수종과 이덕화 배우는 4년 후 <전우>에서 일등중사(지금의 하사)와 사단장으로 재회해 드라마를 이끌었다.
이태란은 <전우>에서 전쟁 전 이현중의 애인이었지만 일제 때 배운 사회주의 사상으로 월북해 북한군의 보병대위가 된 이수경을 연기했다. 이수경은 뛰어난 사격술을 갖춘 저격수로 박일권(김뢰하 분)과 김준범(임원희 분), 백승진(박상욱 분) 등 이현중 분대의 주요 인물들을 사살했다. 그럼에도 사망 후 이수경의 시신을 관에 넣고 태극기로 덮어서 화장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일부 시청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0년대 많은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선역과 악역을 다양하게 넘나들던 배우 김뢰하는 <전우>에서 이현중 분대의 부분대장 박일권 이등중사 역을 맡았다. 박일권은 분대 내에서 각종 힘든 일을 앞장서서 도맡는 책임감 있는 인물로 분대원들이 포로 수용소로 끌려 갔을 때 탈출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거짓 전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심한 전쟁 트라우마를 겪다가 이수경에게 저격을 당해 최후를 맞았다.
<아내가 돌아왔다>와 <천추태후>를 통해 주목 받기 시작하던 신예 이채영은 <전우>에서 개마고원 작전에 투입됐다 혼자 살아남은 해병대원 최단영 역을 맡았다. 최단영은 전쟁 전 여고를 다니다가 무공훈장을 받아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언니와 자원 입대했다. 최단영은 북한군 병참기지를 폭파하는 작전에 참가했다가 이수경의 총에 맞고 전사했지만 폭파작전을 성공시키며 마지막회에서 무공훈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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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참상 보여준 '한국판 밴드 오브 브라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