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 배우 별세배우 이순재의 빈소가 25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27일 오전 6시 20분이며 장지는 이천 에덴 낙원이다.
사진공동취재단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서 어른 행세하고 대우나 받으려고 주저앉아 버리면 늙어버리는 것이다. 난 아직도 한다고 하면 되는 거다."(이순재, 2014년 예능 <꽃보다 할배>중에서 )
2025년 11월 25일, 대한민국 연기사의 거목(巨木) 이순재 선생이 향년 91세로 영면했다.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는 고인과 인연을 맺은 동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사회 각계에서도 추모의 물결이 쏟아지고 있다. 이순재 선생이 떠난 자리에 남은 공허함이 유독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오랫동안 활동해 온 익숙한 배우여서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자신을 증명해 낸 '영원한 현역'이자 '우리 시대의 어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순재의 삶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방송의 역사 그 자체였다. 1935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해방을 맞이했고,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정착하며 한국전쟁을 직접 체험했으며, 현역 1세대 배우가 되어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방송연예계가 발전하는 모습을 모두 현장에서 함께 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순재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재학 시절, 취미로 영화를 보다가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햄릿>에 큰 감명을 받아 배우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1956년 대학 동호회에서 공연한 연극 <지평선 너머>를 통하여 연기자의 길에 처음에 입문했다. 방송을 통한 공식 데뷔는 1961년 KBS의 첫 TV 드라마인 <나도 인간이 되련다>다.
이순재가 데뷔할 때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배우는 이른바 '딴따라'라는 편견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이순재처럼 서울고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고학력 엘리트 출신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는 건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이순재는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작품 분석력과 정확한 발성, 특유의 허스키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 등을 트레이드 마크로 하여, 영화, 연극, TV 등을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한 이순재만의 강직하고 지성적인 학구파 지식인 이미지는 , 대중들에게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풍운>,<사랑이 뭐길래><파천무>, <허준>, <보고 또 보고> <목욕탕집 남자들> <이산> 등 수많은 걸작 드라마에서 눈부신 호연을 선보였다. 통산 140여편에 이르는 출연작을 통해 이순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민 배우' '국민 아버지'로 자리매김했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예능<꽃보다 할배> 등을 통해 정극과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잠깐 정치인으로 외도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순재는 1992년 14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하지만 1996년을 끝으로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이후에는, 정치관련 활동에는 선을 긋고 본업인 연기에 집중했다.
고령의 나이에도 변함없는 연기 투혼
▲연기 열정 불태운 '영원한 현역' 이순재 별세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동해온 배우 이순재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유족에 따르면 이순재는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이순재는 최근까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 등에 출연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사진은 2003년 연극 '리어왕: KING LEAR' 연습실 공개 및 간담회에서 주요 장면 시연하는 배우 이순재. (연합뉴스 자료사진)연합뉴스
80대를 넘긴 이후에도 이순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대작 <리어왕>에서 세계 최고령 리어왕 역을 맡아 3시간이 넘는 장기 공연을 성공적으로 소화하는가 하면, <그대를 사랑합니다> <갈매기> <고도를 기다리며> 등 연극무대에서 말년까지 왕성하게 활약했다. 또한 대학교수와 연극 연출가로도 활동하며 후학을 양성해내는데 앞장서면서, 평생에 걸쳐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2024년 KBS에서 방송된 드라마 <개소리>는 이순재에게 '역대 최고령 연기대상'을 안긴 작품이자 그의 마지막 드라마였다. <개소리>는 인생 2막을 꿈꾸는 시니어들의 이야기를 그린 휴먼 코미디 드라마로, 이순재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노년 세대와 1세대 원로 배우들에 바치는 일종의 헌정극이자, 자극적인 이야기에 지친 시청자들을 위한 따뜻한 힐링 드라마로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이순재는 언제부터인가 개의 목소리가 사람의 언어처럼 들리기 시작한 노배우의 역할을 맡아, 실제로도 본인의 이름과 인생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자전적인 캐릭터를 호연했다. 사실 이순재는 <개소리>촬영 중 건강 악화를 겪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미 드라마 방영 중에도 후반부로 갈수록 눈에 띄게 더 노쇠한 모습으로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연기 투혼을 선보이며 많은 대사량과 난이도 높은 코믹 연기까지 소화해내며 노장의 저력을 증명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올해 초인 1월 11일 방송된 <KBS 연기대상>에서 이순재는 <개소리>로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수많은 걸작들에서 빛나는 연기를 보여줬지만, 유난히 상복이 없던 이순재가 91세가 되어 받은 첫 연기대상이었다. 당시 후배 배우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선 이순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세상에는 '잘나고 성공한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존경받을만한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어느 사회, 어느 분야이든 본받고 존경할 수 있을만한 기준이 되어줄 '어른'의 존재 유무는 매우 중요하다. 이순재는 단순히 나이가 많은 최고령이나 대선배라는 타이틀을 넘어서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후배 배우인 김영철(태조왕건, 야인시대)은 함께 드라마 <공주의 남자>를 찍던 이순재가 긴 촬영대기시간에도 불평 한마디없이 묵묵히 기다리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고 자신의 모습을 반성했다는 일화를 밝힌 바 있다. 2014년 tvN 예능 <꽃보다 할배> 촬영 당시에는 현장에서 불평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이순재는 "나이 먹었다고 어른 행세하고 대우받으려고 주저앉으면 늙어버리는 것"이라고 우문현답을 하기도 했다.
반면 연기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이순재는 2024년 토크쇼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배우는 그 나라 언어의 대변자다. 배우의 언어는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시골 사람이나 서울 사람이나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며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드러냈다. 또한 이순재는 "배우에게 기억력은 자존심의 문제다. 대사를 기억못 해서 동료들에게 피해를 줄 정도라면 연기를 그만둬야 한다"며 배우로서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순재는 후배들을 위한 쓴소리나 민감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소신 발언도 주저하지 않았다. 2018년 '연예계 미투 운동'이나 '버닝썬 사태' 등이 벌어졌을 때 이순재는 대중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큰 어른의 입장에서 잘못된 관행과 가해자들을 거침없이 비판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방송가에서 드라마 쪽대본이 문제가 됐던 시절에는 "중견 연기자도 버텨내기 힘든 환경에서 어떻게 신인들이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겠냐"며 제작환경 개선을 위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2025년은 이순재가 데뷔한지 70년이 되는 해였다. "무대 위에서 쓰러져 죽는 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농담처럼 말하던 이순재는, 실제로도 건강이 크게 악화되기 전까지 차기작의 대본을 연습하며 90을 넘긴 나이에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이 된 이순재에게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하며 반세기 넘게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했다. 한국 대중문화예술계는 비록 이순재라는 위대한 어른을 잃었지만, 그가 남긴 가르침과 수많은 작품 속에서 보여준 불멸의 명연기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의 가슴에 남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는 조건은 각자 다르다. 넉넉하게 태어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조건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과연 나를 이런 환경 속에서 태어나게 한 의미는 무엇일까? 삶의 의미를 찾아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연기다. 그러니 자신을 비하하지말라. 여러분들도 ' 나는 뭐든지 될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을 가지길 바란다(이순재, 2024년 <유 퀴즈 온 더 블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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