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라짜로> 스틸
㈜슈아픽처스
동학농민전쟁의 기원이 가장 풍요한 옥토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기억을 상기하듯, 감독의 고향인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일대를 모티브로 삼은 아름다운 전원 풍광 속에 펼쳐진 고단한 노동의 모습이 전반부 내내 펼쳐진다. 후작 가문은 그들의 노동 덕분에 풍요를 누리지만, 부의 원천인 농민들을 멸시하고 천대한다. 뼈대 있는 귀족 명문가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극단적인 자연과 인간의 대비는 감독이 자국 영화 역사의 오랜 전통, '네오 리얼리즘'의 계승자임을 확고히 각인시킨다.
우리에겐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이나 <움베르토 디>,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와 <로코와 그의 형제들> 같은 작품으로 알려진 네오 리얼리즘 사조는 2차 대전 전후 황폐한 폐허에서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민중의 삶을 가감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세트장이 아닌 야외로 향하고, 저잣거리에서 다큐멘터리 촬영하듯 비전문배우나 지나가는 군중을 화면에 담았다. 그런 영화 전통에서 도시가 아닌 농어촌의 팍팍한 삶과 굳건하게 운명에 맞서는 이들을 조명하던 경향을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현대에 재현한다.
그렇게 얼핏 너무나 목가적인 낙원의 풍경은 곧 그 아름다움에 은폐된 인간 세상의 온갖 구정물과 어둠을 한층 더 극명하게 폭로하는 효과로 기능한다.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영화를 시작한 감독은 그런 이미지 연출에 능숙하다. 하지만 극영화가 기록물과는 다른 작법을 취하는 게 당연하듯, 알리체의 작업물은 그런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자유자재로 어른들의 동화를 구현한다. (실제로 감독은 동화 작가로도 활동하는 중이다)
감독이 구현하는 어른들의 동화는 '우화'의 역할을 충실히 맡는다. 마치 잃어버린 에덴동산처럼 낙원의 풍요 속에서 수탈당하던 주민들은 어이없는 계기로 그곳을 떠나야 한다. 라짜로만 덩그러니 남겨진다. 그를 동정하던 '안토니아'만이 라짜로도 찾아서 데려가야 한다고 외치지만, 아무 메아리도 듣지 못한다. 그렇게 남겨진 청년은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한참이 지나 홀연히 그들 앞에 돌아온다.
네오 리얼리즘에서 우화로, 다시 영화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마술적 리얼리즘' 요소를 과감히 도입하는 결단을 내린다. 라짜로는 어느 순간부터 과연 인간인지 아닌지, 그가 초자연적 존재인지 종잡을 수 없다. 변하지 않은 청년의 모습과 재회한 주민들은 겁을 내거나 혹은 경배한다. 놀림감이던 마을 일꾼은 이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대상, 경이로운 존재로 변모한다. 그러나 영화 내내 라짜로는 사실 아무 변함이 없다. 그는 늘 선량하고 남을 돕는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순진무구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현대에 도착한 예언자가 받는 숭고한 수난
▲<행복한 라짜로> 스틸㈜슈아픽처스
라짜로는 마치 현대사회가 잃어버린 것 같던 가짜 낙원에서 남들이 어찌 대하건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은폐된 낙원은 계속될 수 없다. 공권력은 결국에 위장된 유토피아를 찾아내지만, 그곳 주민들의 처지를 구하진 않는다. 이제 그들은 고단해도 익숙하던 고향에서 쫓겨나 의지할 곳 없는 도시로 이주해야 한다. 그곳에서도 주민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영원한 청년이 오랜 시간이 지나 그들 앞에 도착한다. 그는 아무 쓸모도 없는 백치로 보이지만, 그의 곁엔 음악이 떠나지 않고, 일용할 양식이 가나안 사막에 내려진 '만나'처럼 굶주린 이들에 주어진다. 심지어 그들 모두를 도탄에 빠지게 했던 가해자에게도 구원의 손을 내민다. 물론 참회와 갱생은 그들 각자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렸다.
감독은 알고 보면 냉혹하고 잔인한 이야기를 그저 목가적 우화의 갑옷으로 위장하지만, 현대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풍자와 종교 및 윤리 영역에 속하는 근본적 질문을 감추지 않는다. 형태와 구조를 바꿔가며 빈자를 착취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만행에 대해 폭로하고, 가난한 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구할 수 있는지 라짜로의 기행을 통해 증명한다. 마치 모든 죄인의 업보를 대신 짊어지고 수난을 감수하던 성자의 여정을 그대로 따르듯, 라짜로는 그저 자신에게 떨어진 모함과 냉소, 폭력을 참고 버틸 따름이다. 이 세상 가장 밑바닥의 존재라 해도 좋다.
그런 현대판 성자의 수난은 과연 어떤 결과로 귀결될까? 죄의 대속을 통해 라짜로는 가난 때문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던 이웃들을 구원한다. 나이를 먹고 속세에 찌들어 타락한 이들이 어떻게 갱생하는가는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만 온전히 소화할 수 있다. 그런 구원의 길목에 닿기 위해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대지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이 첨가된다. 알리체 로르바케르가 벼랑으로 폭주하는 세상을 어떻게 관찰하고, 무엇이 더딜지언정 근본 대안이 될지 깊이 천착한 흔적을 관객은 새삼 깨닫게 될 테다.
영화는 마치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처럼 신앙과 인생에 관한 근본을 다루되, 문학의 2차원을 뛰어넘어 고향의 풍경-세계의 질서-개인의 윤리를 꿰뚫어 직시하며 정성스레 직조하는 고된 노동을 감수해 영상 미학의 정수를 담았다. 극장에 다시 깃든 <행복한 라짜로>는 무척 심각한 화두와 잔인한 풍경을 다루지만, 영혼의 치유에 닿는 드문 작업이다.
<작품정보>
행복한 라짜로
Lazzaro felice
Happy as Lazzaro
2018|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독일|드라마
2025.12.03. (재)개봉|(재)127분|(재)12세 관람가
감독/각본 알리체 로르바케르
출연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루카 치코바니, 톰마소 라뇨, 알바 로르바케르
수입/배급 ㈜슈아픽처스
2018 71회 칸영화제 각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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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