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란>에서 딸을 찾아 헤매는 아진을 연기한 배우 김향기.
트리플픽쳐스
영화 <끝나지 않는 세월> <지슬> 등 제주 4.3의 아픔을 다룬 극영화들이 있었다. 다큐멘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극영화에선 소극적이었던 건 아마도 비극적인 역사, 그리고 여전히 일각에서 진실을 가린 채 이념 갈등처럼 몰고가는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수록 영화를 끌고 가는 배우의 용기가 중요하다. 이제 20대 중반을 지나가는 배우 김향기가 그래서 소중한 이유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한란>은 제주 이주민 하명미 감독의 신작. 1948년 그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폭도로 몰린 제주도민의 아픔을 다룬다. 남북 분단을 반대하며 시위하던 시민들을 무력으로 억압하다 결국 시민 무장 봉기까지 일어나며 서로를 향해 총질하던 때에 김향기가 연기한 아진 같은 사례 또한 숱했을 터. 지난 1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향기는 "그때 당시 제 나이 또래의 엄마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감독님 또한 그리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기에 제가 그걸 잘 표현하면 되는 일이었다"며 출연 소감부터 밝혔다.
비극을 헤쳐 간 엄마의 마음
아진은 군인과 경찰의 토벌 작전에 딸 해생(김민채)과 생이별을 한다. 남편은 첩자로 오인받고 시민군에게 사살당하고, 해생은 엄마를 찾아 산에 오른다. 군인과 시민군의 위협 사이에 분투하는 아진의 모습을 김향기가 현실감 있게 표현해냈다. 애초부터 하명미 감독은 아진 역으로 김향기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고 한다. 캐릭터의 아픔을 잘 표현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영화를 보는 현재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힘이 김향기에게 있었다는 것.
"감독님과 처음 만났을 때 3시간 동안 쭉 계획을 말씀해주셨다. 본인이 생각한 이미지, 촬영 장소 등등. 그 말씀에 믿고 가면 되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제가 딸 민채와 같이 촬영하기에 다소 예민할 수 있는 현장이다 싶어서 감독님과 소통이 그만큼 중요하다 생각했다. 사실 제가 엄마 역할을 하는 것에 놀랐다는 반응들이 있었는데,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촬영을 마칠 때까지 전 제가 엄마라기 보단 아진이라는 인물의 개성을 생각하며 연기했다.
다만 궁금했던 건 모성애인데, 캐릭터와는 별개의 보편적인 감정 같아서 여러 책과 영상을 찾아보긴 했다. 해생이를 찾기 위해 거친 여정을 쭉 나아가잖나. 그 에너지가 모성애라 생각했는데 책을 보니 호르몬 체계가 바뀌며 모성애가 나오는 것 같더라.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상태로 이해했다."
아진은 고씨성을 지닌 제주 토박이다. 결혼 전까지 해녀였고, 물질로 생계를 이어온 몸과 마음이 건강한 20대였다는 게 김향기의 해석이었다. 마을 간 유대감이 깊어서 그 난리 중에 산을 헤매면서도 서로 강한 유대감을 나누는 장면이 영화에 등장한다. 김향기는 4.3 관련 영상과 책을 보며 당시 정서를 파고들었고, 특히 제주말 대사를 위해 감독에게 감수자 과외를 요청하기도 했다.
"제주 4.3 연구소에서 편찬한 할머님들 증언집이 있다. 읽으면서 감정적으로 힘들긴 했는데, 역할을 할 때 감정적 상상에 도움을 받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작품은 제 3자의 입장에서 상상하고 정보로만 접하게 되는데, 증언집은 그 자체에 빠질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가장 걱정인 게 제주어였다. 감수자분들에게 촬영 들어가기 전 2개월간 일대일 수업을 받았다.
해생의 민채를 만났을 때, 낯가림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 없었는데 막상 친해지니 수다쟁이더라(웃음). 귀엽다는 말을 싫어할 수도 있으니 개인 취향 묻고, 사적인 얘길 나누면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 했다. 그 친구도 한 명의 배우니까 제가 연기적 도움을 주기보단 민채의 모습으로 현장에 있을 수 있게끔 돕고 싶었다. 둘이 분장하고 카메라 앞에 섰는데 막상 더 닮은 것 같더라(웃음)."
▲<한란> 스틸
㈜트리플픽쳐스
의미와 재미 사이에서
4세 나이 한 잡지 표지 모델로 등장하며 연예계에 데뷔한 김향기는 어느덧 경력 20년을 훌쩍 넘겼다. 아역 배우에서 성인 배우로 자연스럽게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그의 필모그래피도 흥미롭다. 영화 <마음이>(2006), <늑대소년>(2012)에서 사랑스럽고 당찬 모습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고, 천만 관객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나 최근 드라마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등으로 대중성을 인정받았다. 동시에 일본군 위안부 사건을 극화한 <눈길> 등 역사적·사회적 의미가 있는 독립예술영화에도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배우로서 다양한 캐릭터를 하고 싶은 마음이 큰데 들어오는 시나리오 안에서 결정하는 거잖나. 그중 제가 마음이 간 걸 하다 보니 지금의 필모그래피가 나온 것 같다. 20대 초반엔 고민이 많았다. 아역 때부터 같이 가져온 이미지가 있다 보니 그걸 지키고 싶은 마음과 다양한 역할로 날 증명해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간극이 컸다.
하지만 그 시기에 내게 맞는 역할을 제안주시는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요즘엔 내가 잘 해낼 수 있는지 그 질문만 스스로에게 한다. 제가 살아온 과거는 없앨 수 없는 것이기에 평생 안고 가야 하는 거라 생각한다. 최대한 거기서 긍정적인 걸 뽑아내서 잘 사용하는 게 오래 연기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연기자의 길에 확신을 가진 시점을 물으니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을 꼽았다. "그 전에 1년 정도 연기를 쉬며 친구들과 재밌는 시간을 보냈을 때 문득 심심하다는 감각이 있었다"며 김향기는 "아무 생각 없이 놀 때도, 부모님이 하기 싫으면 안 해도 좋다고 했는데도 촬영장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이건 계속 해야 하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평소 본인에게 환기를 주는 일상 습관 중 하나로 산책을 꼽은 김향기는 평소 산책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친한 친구들을 만나는 것으로 자신다움을 지키는 것 같다고 전했다. 베테랑다운 경력임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캐릭터가 많다던 그는 "그래서 건강을 더욱 잘 지키기로 했다"고 웃어보였다.
"그런 면에서 제 상상력도 더 좋아져야 할 것 같다. AI에 연기를 맡기고 싶지 않다(웃음). 감정이 느껴질 수 있게 하는 게 배우 역할인데 그걸 잘 해내자는 생각을 계속 한다. 물론 AI도 유용하다. 다만 너무 올바른 답만 주니까 상상의 여지가 없달까. 좀 딴소리긴 한데, AI를 활용할 때 전 특정 감정마다 어떤 근육이 사용되는지 이미지를 요청하곤 한다. 이거 나름 꿀팁이다! (웃음)"
▲영화 <한란>에서 딸을 찾아 헤매는 아진을 연기한 배우 김향기.트리플픽쳐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공유하기
제주 4.3의 아픔 안은 김향기 "제주말·모성애 공부하며 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