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없는데 꿈도 없고 일이 없는데 돈도 없다... 2025년 청춘 자화상

[김성호의 씨네만세 1218]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서로 사귀는 사이라는 남녀 고등학생 한 쌍이 또래처럼 보이는 여학생 하나를 괴롭힌다. 서로 초면인 여학생이 피해 학생이 찾아 헤매는 앵무새를 보았다고 먼저 연락한 듯, 이들이 한자리서 만난 것이다. 그 자리엔 피해 여학생을 먼저부터 알고 지낸 듯 보이는 남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짜고짜 본색을 드러내는 이들이 피해 여학생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말하자면 유인책에 걸려든 것. 어째서 학교에 나오지 않느냐며, 오래 지속된 것처럼 보이는 괴롭힘이 하는 이에게도 받는 이에게도 익숙해만 보인다.

이들은 피해 여학생이 가지고 있던 동물을 잡아 담는 케이지를 빼앗는다. 마치 축구경기에 앞서 선수들이 술래를 가운데 놓고 빙 둘러 서서 몸을 풀 듯이 둘이 케이지를 던져 주고 받으면서 피해 여학생을 괴롭게 한다.

이 장면에서 인상적인 한 순간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마도 의도된 것일, 누군가는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할 수도, 다른 누구는 지극히 현실적 반영이라 할 수도 있을 설정에 대한 것이다. 두 학생이 또래 한 학생을 괴롭히는 이 장면은 학교 바깥 길거리에서 촬영됐다. 이 영화 가운데서 종종 그러하듯, 배우인 이들 세 사람을 뒤로 하고 아무렇지 않게 행인들이 지나치는 모습이 이색적으로 표현된다. 그 무심한 동선과 시선처리를 보고 있자면 이것이 촬영임을 알면서도 지나가는 행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 말하자면 통상적인 단역배우라 보기에는 어딘지 낯설고 이상하다는 뜻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스틸컷
동에 번쩍 서에 번쩍스틸컷그린나래미디어

존재하지 않는 듯, 외면하는 사람들

이광국 감독의 신작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속 이 장면이 특별한 것은 괴롭힘이 아니라 지나치는 행인들에 있다. 어째서 그들은 이토록 무감하게, 철저히 학생들의 괴롭힘을 외면하는가. 마치 도로를 가로막은 촬영팀을 피해 갈 길을 서두르는 것처럼, 카메라에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내달리는 듯 사라지는가. 그 외면이 피해 학생에게는 구원을 찾을 길 없는 버거운 세상의 표정인 것처럼 다가올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속 단역배우의 활용은 여러모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애써 자연스러움을 연기하는 통상적 영화와는 달리, 마치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듯이 관련 없이 존재한다. 그 모습이 영화 속 사람들과 실제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처럼 느껴질 때도 없지 않다. 그것이 철저히 의도된 설정이라기보다는 미처 그 활용법에 신경 쓰지 못한 서투름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장면들이 바로 영화의 주제와 맞닿는다는 점이 신선하고 신기하다.

주인공은 이십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두 청년 설희(여설희 분)와 화정(우화정 분)이다. 졸업 후 취업준비 중이지만 딱히 미래가 확정되지 않은 구직자들, 다른 말로 하자면 청년 실업자이자 우아할 수 없는 백조들이다. 설희는 왕년에 운동선수, 아마도 육상선수였던 듯 보이지만 부상으로 그만둔 지 오래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지만 그마저 고정적인 자리를 찾지 못하고 옮겨 다니는 중이다. 누가 꿈이 어떻게 되느냐 묻는 것이 난감한 꿈 없는 청춘, 설희라고 제 현실이 마음에 들 리 없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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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없는 청춘, 꿈까지 없다면

그녀와 함께 사는 화정도 딱히 답이 없다.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돌려도 들려오는 건 탈락 소식 뿐, 그나마 최근엔 최종면접까지 본 곳이 있어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다. 불안은 청춘의 동반자라고들 하지만, 그 불안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어떻게든 오늘의 불안을 떨치고 빛나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설희가 그러하듯, 그 희망찬 미래가 무엇인지도 불명확하지만 말이다.

영화는 두 친구가 일출을 보고 소원을 빌자며 즉흥적으로 동해로 바다 여행을 떠나는 모습으로 출발한다. 뜨겁게 타오르는 해를 보며 기분 좋게 소원을 빌자고 했지만 그 일 하나도 제 마음처럼은 풀리지가 않는다. 추운 새벽 바닷가에서 덜덜 떨며 기다리다 깜빡 잠든 사이에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뜬 것이다. 이런 낭패가. 그로부터 계획은 모조리 틀어지니 여행지에서 두 친구가 갈라져 따로 시간을 보내기에 이른다. 보증금은 제 돈으로 넣어두고 있던 화정이 이제는 혼자 살고 싶다고 통보한 것이고, 가뜩이나 계획도 없던 설희가 날벼락을 맞은 것. 감정적으로 싸운 두 사람이 서로 동해에서 보낸 시간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의 얼개를 이룬다.

영화는 두 사람이 각자 낯선 이와 만나 보낸 시간을 그린다. 설희는 터미널에서 과호흡으로 괴로워하는 또래 여성을 만나 돕는다. 그녀를 돕다 그 집에까지 가게 된 설희는 우연히 그녀가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극단적 선택까지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적극적인 화정은 먼저 말을 걸어 어린 여학생 한 명과 말을 튼다. 서두에 적은 괴롭힘 당하는 여학생이 바로 그녀로, 학교를 가야 할 시간에 집 나간 앵무새를 찾겠다고 나다니는 모습이 화정의 눈에 띈 것이다.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함께 새를 찾기로 한 화정은 그녀와 인상적인 하루를 보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스틸컷
동에 번쩍 서에 번쩍스틸컷그린나래미디어

우울과 소외에 대항하는 연결과 연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은 여러모로 단순한 영화다.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이 틀어지고, 여행지에서 마주한 새로운 관계와 경험들로 채워진 소소한 이야기다. 우울을 겪고,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무관심과 소외로 고통 받는 이들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위로를 얻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풀어가는 방식이 투박하고 직설적이지만 소박하고 담백한 이야기를 선호하는 이에게는 나름의 매력도 없지는 않을 테다.

이광국 감독은 6년 여간 진행한 단편영화 워크숍 과정에서 만난 신인 배우들과 함께 협업을 진행했다. 영화 속 생소한 젊은 배우들이 모두 실명 그대로 출연한단 점도 이색적이다.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허무는 것, 그것이 아직 어설픈 구석이 있는 젊은 배우들을 북돋는 길이자 이 영화의 목표와도 맞닿아 있는 때문이겠다. 처음엔 아주 단순한 설정으로 출발한 작품을 감독은 배우들과의 대화를 통해 한 편의 장편으로 탈바꿈시켰다고 전한다. 영화 전반에 젊은이의 진솔한 이야기가 얼마간 묻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새롭지 않은 소재, 단순하고 투박한 화법에도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서두에 적은 한 장면이었다. 영화 속 사람들은 극중 인물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외면하고 지나친다. 마치 그들 자신이 영화 속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양. 그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 이들이 영화 속 인물들이다. 학교폭력으로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우울에 시달리는, 꿈도 희망도 없이 오늘을 소모하는, 불확실한 미래에 흔들리는 가여운 젊은이들이 각자도생하지 못하여서 부서지고 스러져 간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포스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포스터그린나래미디어

외면하는 행인에게서 나를 보았을 때

애써 떠난 여행에서 그나마의 관계마저 깨어진 순간, 이광국 감독은 또 다른 관계를 통해 이들에게 다음 기회를 허하려 든다. 각자도생은 답이 될 수 없다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것이 오로지 죽고 죽이는 전쟁터 위에서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기지 못해도 함께 맞서주는 이가 있고,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제 마음을 전하려는 이가 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해서라도 어떻게든 이어져야 하는 것이 사람이라고, 그는 서툰 말씨로 말을 건넨다.

청년실업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오늘이다. 통계청 조사에 '그냥 쉬었다'고 답하는 20대 청년이 매 조사마다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며 바야흘러 대실업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만성적 경기불안에 더하여 인공지능(AI)의 보급으로 경력은 뽑아도 신규는 뽑지 않는다는 기업이 갈수록 늘어난다. 대학교를 졸업하는 즉시 잉여가 되는 젊은 세대가 청년 우울로 이어지기 쉽다는 지적 또한 끊이지 않는다. 공동체가 파괴되고 각자도생의 풍토가 자리한 한국의 현실 속에서 긍정적 경험을 맛보지 못하고 사회적 유대까지 끊어진 청춘들의 현실이 참혹하기 그지없다.

폭증하는 은둔 청년들, 매해 200명이 넘는 청년이 고독사로 숨지는 현실, 영화처럼 먼저 손 뻗는 이와 우연한 조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하나하나 한국의 현실이다. 그 현실 가운데서 무심하게 지나치는 단역배우의 뒤통수만이 나의 모습이 아닌가를 의심한다. 공동체는, 관계는, 연결은 과연 복원될 수 있을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속 작은 연결들이 마주하는 결코 만만치 않은 고난은 우리 시대의 초상을 비추려는 결과가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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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