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연씨의 굿즈 소장품들
김정연
2030 여성팬의 유입은 팬층의 다변화 뿐만 아니라 한국 야구팬이라는 공동체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야구장은 '술 취한 아저씨들의 공간'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세대와 성별의 차이 없이 누구나 어울릴 수 있는 새로운 축제의 장으로 거듭났다. 중장년 남성과 2030여성이라는 상이한 관객층이 한자리에서 경기를 즐기며 자연스레 소통하고, 다양한 관람 문화가 교차하는 현장이 연출되고 있다.
이 변화는 야구 응원 방식의 전환, 관람 편의시설 확충, SNS 기반 소통의 활성화 등 야구장 자체를 공동체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이는 팬덤의 주도권이 어디를 향하느냐의 문제가 아닌 훨씬 더 큰 공동체로의 확장을 의미한다. 나이와 성별을 초월해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문화의 장으로 야구장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평소라면 어색할 택시 기사님과도 야구 이야기를 하면 금세 친구처럼 가까워진다는 김정연씨.
"야구팬에게는 세대도 성별도 중요하지 않아요. 응원하는 팀이 달라도 서로 관심을 가지고 챙겨줘요. 경기도 사람이 삼성을 응원하다보니 가 볼일 없던 대구에도 갔어요. 유니폼만 보고 말을 거는 분도 계셨어요. 덕분에 지역 구장 원정도 즐길거리가 됐어요. 친구과 내년엔 전국 구장을 다 가보자는 얘기도 했어요. 이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경험을 야구 덕에 해보는 거죠."
세림씨 역시 야구를 매개로 새로운 인연과 경험을 많이 쌓았다고 말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나이차가 많이 나는 직장 상사와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어요. 둘 다 야구팬이었거든요." 유니폼을 입고 밖을 다닐 때면 말을 거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고. "부산 지하철에서는 제가 입은 두산 유니폼만 보고 야구 얘기를 자연스레 하셨던 할아버지도 계셨어요. 맛집을 추천해주시거나 제가 몰랐던 선수들의 비하인드를 들려주시더라고요." 세림씨는 야구 시즌이 끝나고 찾아간 팬미팅에서도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밝혔다.
"9살인 아이가 혼자 티켓팅에 성공한 거예요. 그 부모님이 동반자를 구하길래 제가 자원했죠. 그날 하루 동안 같이 야구 얘기도 하고 철웅이(두산 마스코트)가 나오는 인생네컷도 찍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이런 신뢰가 야구팬들 사이엔 있어요."
야구장에서의 연결은 그 밖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에 속한 셈이다. 세대를 막론하고 각자 자신의 팀이나 선수의 경기를 응원하면서 개인적 일화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됐다. 이처럼 팬들을 긴밀하게 엮어주는 근원은 무엇일까. 야구는 끝나기 전까지 아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꼴찌팀이 1위팀을 꺾는 일이 그리 큰 이변이 아니다. 연장전의 역전이나 무명 선수가 만들어 낸 결정적인 한 방이 주는 감동은 야구의 수많은 변수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변수 위에 있는 예측불가능한 긴장감과 드라마에 매료된 사람들은 그 감동을 함께 공유한다.
황세림씨는 "경기장에 앉으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마음, 같은 기원을 품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팀워크와 열정은 선수에게만 있는 게 아니에요. 관객 모두가 공유하죠"라고 밝혔다. 최근 은퇴한 김재호 선수의 은퇴식에서, "유니폼을 후배 신인에게 입혀주고 마운드를 내려올 때, 유격수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입맞춤을 하는 선수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코믹한 응원가를 따라부르며 주변 팬들도 다들 같이 울었어요." 그는 야구에는 끊을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야구에 스며들게 돼요. 심지어 비시즌에는 구단 훈련 영상을 보거나 다음 시즌을 예측하며 시간을 보내요."
"야구는 일주일에 6번이나 경기를 치루는데 오늘 진다고 끝이 아니에요. 내일이 또 오죠. 1위와 10위가 겨뤄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게 특별해요"라고 야구의 매력을 밝힌 김정연씨. 그는 20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선수, 늦게 빛을 발하는 베테랑, 예기치 않게 무너지는 스타의 모습 등 경기장에는 각자의 특별한 스토리가 있음을 강조했다. "힘들 때 선수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나도 열심히 해야지' 하고 생각해요. 또 하루 살아갈 힘을 얻는 거죠."
공감과 연결의 광장, 야구장이 일으키는 변화
야구장은 이제 단순한 경기장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각기 다른 세대와 성별,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소통하고 연결되는 현대적 '광장'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팬들은 팀이나 선수를 응원하며 같은 경험을 공유할 뿐 아니라, 처음 만난 타인과도 평범하게 관계를 맺으며 야구팬이라는 정체성이 주는 새로운 소속감을 체험한다. 야구장은 이제 일상의 배경이 되고, 관계의 기억이 되는 사회적 장소로 변했다.
이러한 변화는 독일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public sphere)' 이론을 빌려 설명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구조변동> 등 주요 저작에서, 공론장을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개인들이 자유롭게 모여 사회적 쟁점과 공적 가치에 대해 토론하는 공간"으로 정의했다. 즉, 계층이나 신분, 이념을 넘어 대화와 문제 해결이 일어나는 사회적 기반이 진정한 공론장이라 본다.
핵심은 '의사소통적 합리성' 원칙에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강요가 아닌 상호 이해와 합의를 통해 사회가 확대되고 정당성을 얻는다. 오늘날 야구장은 다양한 세대와 성별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콘텐츠에 집중하며, 현장과 온라인 모두 감동을 공유하는 '현대적 공론장'의 예시로 자리잡았다. 야구장이 공동체 경험을 촉진하고 민주적 소통의 훈련장으로 진화하고 있다.
다양한 관객이 섞여 함께 야구를 경험하고, 같은 드라마를 각자의 언어와 기억으로 다시 쓰고 있다. 야구장은 이제 취미의 공간을 넘어 공동체 경험과 만남의 장이 되었다. 구단들도 이에 맞춰 어린이 시즌권이나 가족 단위 패키지와 같은 아동 친화적 정책과 누구나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응원 공간 확보, 팬들과 함께 하는 이벤트를 늘려가는 추세다.
롯데 자이언츠는 14세 미만 어린이 회원을 위한 '키즈클럽'을 운영하며, 전 구장 외야 무료입장, 유니폼·모자 패키지, 홈경기 시구·시타 체험 등 다채로운 가족 체험 행사를 제공하고 있다. SSG 랜더스는 '레이디스 데이'를 열어 여성 관객에게 특별 할인, 포토타임, 선수 인터뷰 행사, 여성 전용 굿즈 등 맞춤형 혜택을 마련했다. 롯데·SSG 등은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현장 매표 창구 운영, 예매 안내 서비스, 전용 좌석 확보 등 고령 관객이 티켓을 쉽게 구입하고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고 있다.
이처럼 각 구단의 세심한 관객 정책과 현장 서비스는 야구장이 세대를 아우르고, 모두의 취향과 필요를 존중하는 열린 커뮤니티로 진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야구장은 스포츠를 넘어 다양한 삶이 교차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진정한 소통과 연대의 광장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구장이 완전히 평등하고 안전한 공간이라고 말하긴 여전히 어렵다. "치어리더 옷이 너무 과하게 벗겨지거나, 배트걸은 꼭 반바지 착용에 예쁜 여성으로 내세우는 게 당연하게 여겨져요. 어린 팬들도 많은데, 이런 부분은 분명히 바뀔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 나연씨는 심판진 구성과 팬문화도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라 지적했다. "마케팅이나 현장 운영이 더 포용적으로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어린 아이들이나 가족들도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야구장에 더 많아졌으면 해요."
디지털 접근성 이슈 역시 야구장이 넘어야 할 과제다. 온라인 예매와 모바일 중심의 관람 시스템은 일견 편리하지만, 디지털 취약계층이나 장애인에게는 여전히 높은 장벽이 된다. 최근에는 일부 구단이 장애인석을 일반석으로 둔갑시켜 판매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이런 사건은 단순한 운영 미비가 아닌, 야구장이 '열린 공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완전히 평등하고 포용적인 광장이 되기까지는 아직 과제가 남아있다. 일부 팀의 치어리더 노출 문제나 남성 중심의 특정 응원문화는 모두가 편하게 즐기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있다. KBO 팬덤의 성별·세대 변화가 더욱 뚜렷해질수록, 구단과 리그의 공동체 운영 방식도 그에 맞춰 유연하고 포용적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
하버마스가 강조한 '공적 논의와 만남의 장'으로, 모두가 스스럼없이 모이고 소통할 수 있는 공유장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누구나 자유롭게 소통하고 주체적으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나아가야 한다. 야구장이 이러한 광장의 역할을 실천해낼 때 한국 야구는 단순한 흥행을 넘어 사회적 다양성과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스포츠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