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람과 고기> 스틸 이미지.
㈜트리플픽쳐스
영화는 연로한 명배우들의 명불허전을 증명한다. 박근형(형준 역), 장용(우식 역), 예수정(화진 역) 세 명의 주인공들은 폐지 줍기와 행상으로 연명하며 각각의 가난한 삶을 나름껏 감당하며 살아간다. 박스 소유권을 다투다 주먹질까지 하게 된 두 남성 노인과 그들의 싸움을 지켜본 여성 행상 노인은 이를 계기로 의기투합하게 된다. 그것도 감히 젊은이도 결행하기 힘든 무전취식과 도주라는 예상 밖의 행각으로 말이다. 정말 깜짝 놀랐다.
노인들의 이러한 일탈에 대해, 우선은 당연히 가난이 죄겠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라고 영화는 말하고 싶어 한다. '아프니까 노년이다'가 아니라, 아파도 늙어도 삶이 있다고 항변하듯이 말이다. 몸은 늙으며 퇴화해 덜거덕거려도, 정신은 때때로 소싯적 몸과 마음의 상태로 이입되곤 한다. 물론 '어이쿠 그때 몸이 아니구먼' 하고 얼른 물러서지만, 마음만은 냉큼 물러서지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러한 몸과 정신의 부조화는 당황, 충격, 억울, 분노 등의 지난한 길항을 거쳐 받아들임의 단계에 봉착한다. 물론 어떤 노년은 노쇠를 거부하며 이를 도전이라는 말로 멋지게 탈바꿈시켜, 각종 보조제, 시술(수술), 레저 활동이나 격렬한 운동 등으로 절대 늙음에 지지 않겠다는 투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이렇게 분투하는 노년은 갱신된 노년으로 미화되고, 연령 분수에 맞게 희끗한 머리, 느려진 움직임, 줄어든 외부 활동 등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견지하면 게으른 노년으로 평가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늙어라'는 식으로 훈계하는 언설은 주로 먹고 살 만한 경우의 주장인 경우가 태반이다. 먹고살 만하다고 노화와 노쇠가 비껴가는 것은 아니지만, 늙음을 돌볼 수 있는 경제적 여력과 문화적 자본은 늙음의 질을 확연히 달리 만든다. 윤택한 삶의 여건이 만든 현명함과 너그러움을 타고난 인품인 양 과시하며 곱게 늙으라는 둥,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둥의 주장을 펴는 이들은 자신들과 상반된 삶의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고나 떠드는지 종종 뜨악하다.
이를테면 어느 노교수는 은퇴 후 시골에 머물면서 농사와 독서로 제2의 삶을 경영할 수 있었다. 공부만 하던 몸이 농사라는 노동에 적응하는 것도 상당한 노력과 인내를 요하기에 간편한 인생 2모작이라 폄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도시에서 폐지나 줍고 있지 말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책 읽으며 여가를 즐"기는 '노년의 자유'를 설파하는 게 과연 취약한 노년 일반에게 설득력 있는 조언인지 모르겠다. 취약한 노인의 시골살이가 어떻게 그리 말처럼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모 교수처럼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안분지족할 수 없는 노인들은 취약한 복지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폐지를 줍거나 행상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반찬이라도 사 먹고, 급한 약이라고 구하고, 손자의 용돈이라도 쥐여주고, 터무니없는 세금도 내야 하기에, 거리에서 노동할 수밖에 없다. 고되게 폐지 주워 고작 천원 이천 원을 손에 쥐고 억울하지만 안 할 수도 없는 삶이다. 이러니 언감생심 고기를 사 먹을 형편이 되겠는가.
인간은 고깃덩이가 아니기에 고결해야겠지만, 세일하는 삼겹살을 집었다 놨다 하다 결국 사지 못하거나, 식당 유리를 통해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고기의 맛을 냄새만 맡하다 결국 사 먹지 못한 채 군침만 삼킬 때, 동물보다 우등해야 한다고 믿어지는 인간은 돈이 없어 고기를 먹지 못함으로써 열패감을 느낀다. 이렇게 '사람과 고기'라는 제목은 인간의 동물 우위라는 관념을 불식시키며, 고기 먹지 못하는 인간의 비애라는 아이러니를 통해 박탈된 노인의 삶을 조명한다.
박탈된 노인의 삶
▲영화 <사람과 고기> 스틸 이미지.㈜트리플픽쳐스
그래서 이들 노인 셋이 둘러앉아 소고기뭇국을 한 솥 끓여 다 먹어치우는 장면은 고깃국을 통해 이들이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획득하게 됨을 보여준다. 양지에서 우러나오는 진국의 소고기 국물에 나박나박 썰어 넣은 무의 시원함이 가미되면 그야말로 기막힌 음식이지 않은가. 그 구수한 고깃국에 말아먹는 국밥의 맛과 행복감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이렇게 추동된 노인들의 고기 사랑은 점차 범죄라 불릴 수 있는 위험한 도전으로 나아간다. 배불리 먹고 도망가기 위해 작전을 짜고 하나씩 식당을 빠져나갈 때, 관람객은 식당 주인장의 손해는 잠시 잊은 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어느새 노인들의 무사 도주를 기도하게 된다.
노인들이 고기를 먹고자 하는 욕망이 물론 권리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범이 되어야 할 노인들이 이딴 짓이나 하고 다니냐는 싹수없는 판사의 판결에 동의할 수는 없다. 새파랗게 젊은 판사에게 모욕과 무시와 차별을 당한 노인의 억울함은 이 또한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복수를 낳는다.
이들의 '고기 먹튀'를 조장한 우식의 입장은 식탐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알고 보니 암 말기 환자인 것을 알고 치료를 재촉하는 형준와 화진에게 그는 낫지도 않는 병을 고치겠다며 투병하느라 남은 삶을 허비하느니 먹고 싶은 고기를 먹다 죽겠다고 항변한다. 비록 늙었어도 삶에 대한 주도권을 병에게 내주지 않겠다는 사람으로서의 의지를 고기 먹음으로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이들의 '고기 먹튀'는 그저 고기를 탐하는 노욕이 아닌 삶에 대한 주체성으로 갱신된다.
뜨거운 소고기뭇국을 호호 불어 한 입 떠넘기며 '이보다 좋을 수 없다'는 듯 입가에 번져나가는 무해한 미소는 가난한 노인들의 유일무이한 행복감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고기는 쾌락의 도구가 아니라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소울푸드인 것이다. 돌아가신 내 엄마의 '최애' 음식도 설렁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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