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차가운 숨>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원래 백일 기념으로 엄마 보러 가자고 하려 했는데."
학생인 승연(정민주 분)과 연수(윤성우 분)는 사귄 지 백일이 되는 날 헤어졌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늦은 밤 초라한 행색으로 여자 친구의 집을 찾아온 연수의 모습을 보면 어떤 모양의 연애가 둘 사이에 있었을지 느낌이 온다. 이별을 맞이한 두 사람은 이제 어떤 사이도 아니지만, 아직 미련이 남은 그는 대뜸 자신의 엄마를 만나러 가자고 제안한다. 정확히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묘지다. 언젠가 두 사람이 만나고 있던 중에, 사정을 알 리 없던 승연이 섣부른 약속을 했던 모양. 그렇게 이상한 동행이 시작된다. 밤늦은 시간, 두 어린 학생이, 헤어진 상태로,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를 만나러.
채한영 감독의 작품 속에서는 관계 내부의 서로 어긋난 정서와 성장기의 흔들리는 내면과 같은 소재들이 지속적으로 발견되어왔다. <선아의 방>(2017)에서는 가족이라는 경계 속의 타자성이, <보이는 어둠>(2020)에서는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불안이 그려지는 식이었다. 소재를 스크린 위로 호출해 내는 방식 역시 일관성을 보였다. 대사를 최소화하는 대신 인물의 시선과 침묵에 중심을 두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연출은 그 감정을 설명하기보다는 관객이 이해하는 과정으로 이끌었다. 이번 작품 역시 유사하다. 청소년기의 설익은 사랑과 연애 위에서 그려지는 두 인물의 관계와 서사는 그들의 로맨스가 무조건적으로 무해하고 순수할 수 있다는 착각에 균열 하나를 일으키며 내부적 권력과 위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02.
영화 <차가운 숨>은 한 번의 연애가 막 끝난 뒤의 시간이 배경이 된다. 어느 한쪽에 의해 관계의 종언은 선언되었지만, 아직 실제적인 감정은 여전히 서로의 영역을 맴도는 때다. 연수가 승연을 찾아와 엄마한테 가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그래서 단순하지 않다. 이 어색하고 껄끄러운 재회가 그 안에 숨겨진 감정적 동의와 위계의 문제를 비추며 단번에 복잡한 층위를 드러내도록 유도하고 있어서다. 처음 두 사람의 사랑과 이별은 우리가 '연애'라고 부르는 행위의 한 사이클처럼 보이지만, '어머니의 묘지'가 내세워지면서부터 은근한 압력과 묘한 강요의 기미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연수가 승연을 데리고 가고자 하는, 또 데리고 가는 장소인 어머니의 묘지는 단순한 기억 공유의 차원을 넘어, 자신에게 주어진 애도의 감정과 고독의 시간을 타인에게 전가하기 위한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은 '함께 가주었으면 좋겠다'이지만, 이 말의 속뜻은 '함께 감당하라'는 요구와 강요에 더 가까워서다. 두 사람이 과거 연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리고 오늘이 백일이라는 기념일이라는 이유로 이미 끝난 감정의 자리에 타인(가까운 존재)의 애도를 불러오는 이 과정은 정서적 무례함과 감정적 전가를 동반한다. 심지어, 그런 상황에 일방적으로 놓이게 되는 승연은 (일반적으로) 유사한 상황에 놓여 본 경험이 부족할 나이다. 그들의 사랑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영화 <차가운 숨>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3.
"오늘은 내 말대로 좀 해. 그래야 공평하지. 너도 네 마음대로 헤어지자고 했잖아."
이러한 설정이 지속적으로 승연에게 위력을 가할 수 있는 이유는 영화가 선택한 배경인 묘지가 두 인물의 감정적 긴장을 응축시키는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사실, 무덤이라는 공간은 실제적으로 죽은 자를 위한 공공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자들이 사적으로 무너지기 쉬운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 공간을 연수가 감정의 무게를 전시, 전가하고 승연이 그런 압력 속에서 위계 구조 안에 갇히게 만드는 장소로 활용하고자 한다. 이 장소가 열린 동시에 닫혀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 또한 힘을 더한다. 묘지 자체는 누구나 오갈 수 있는 공개된 장소지만 '밤'이라는 제약이 붙는 순간, 누구도 가까이 오지 않을 폐쇄성을 띠게 되며 그곳에 존재하는 이들을 외부로부터 격리한다.
하나가 더 있다. 영화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이 최소한의 예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줄 뿐, 돌아가신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추억할 만한 사진, 유품을 보여준다거나,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의 행위는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연수의 자전거를 타고 다소 먼 곳에 떨어진 장소로 이동하는 컷을 길게 보여주면서 그 장소로 누군가를 데려가는 일에 더 무게를 두고자 한다. 감정이 아닌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행위 속에 감춰진 대상의 욕망이다.
서사적으로는 승연이 연수의 외투 주머니로부터 특정한 의도가 담긴 매개를 발견하면서부터 그 욕망이 극 내부로 투영되기 시작하고, 감정적 전환이 발생한다. 하지만 연수가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공간을 선택하며, 그 속내를 모르는 승연이 자신의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하는 순간에 이미 관계의 균형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차가운 숨>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4.
한편, 채한영 감독은 중심인물인 승연과 연수 두 사람의 사건 뒤편에 승희(한가빈 분)와 재준(장우빈 분)의 서사 하나를 배치한다. 승연의 언니인 승희와 연수의 친구인 재준 역시 같은 날 밤,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는 커플이다. 두 사람은 승연이 연수의 제안을 받기 전에 헤어지고 무덤에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재회하게 되는데, 결국 이들을 통해 마지막으로 보여지게 되는 모습은 일방적인 욕망과 폭력에 가까운 행위다. 더 중요한 것은 친구 사이인 연수와 재준이 각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말을 맞췄다는 점이다. 이는 중심 사건인 승연과 연수 사이의 서사로 다시 돌아와 일련의 모든 과정이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도에 의한 것이었음을, 보이지 않는 감정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배려나 호의의 문제로 결코 축소할 수 없다.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얼굴 사이에는 그렇게 기울어진 권력의 비탈이 존재하게 된다. 거절의 어려움은 그런 관계의 비대칭으로부터 비롯되며, 이는 관계 내부의 감정적 위계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영화 <차가운 숨>이 응시하고자 하는 자리가 바로 그런 비탈에 있다. 비교적 무거운 소재를 다루고자 하면서도 청소년기의 사랑에 주목한다는 점, 청소년 영화의 외피를 입고 있으면서도 명확한 정서적 표현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되지 못할 감정적 상태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감정을 명확히 정의하거나 선뜻 설명해 내지 않는 태도 또한 그 안에서 미덕으로 자리한다.
이 영화에서 침묵은 결코 공백으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의미가 압축된 밀도의 시간이라는 생각이다. 끊임없이 주어지는 권력과 위력 아래에서 무엇을 말하지 못했는지 다시 한번 떠올려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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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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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한 여자 친구 찾아온 남자, 대뜸 무덤에 가자고 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