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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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아래 <김부장 이야기>)의 긴 제목을 끝까지 유지한 선택은 정확했다.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 - 이 단어 네 개는 각각 대한민국 중년 남성이 살아오면서 쌓아온 성공의 증표다. 송희구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그 시작은 미미하지만 조금씩 상승세를 보이며 시청자들의 반응을 조금씩 모으는 중이다.
현실적인 묘사에 울컥했다는 반응도,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 같다는 반응도 있다. 이러한 반응으로 알 수 있듯 드라마가 포착한 것은 지나친 현실감이다. 그 현실감은 바로 결핍, 정확히는 충족의 역설이다. 드라마 속 김 부장인 김낙수(류승룡)는 이미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렇기에 더 불안하다. 25년을 버텨온 대기업 부장의 자리는 그를 보호하는 동시에 옭아맨다.
원작과 다른 구성, '50대 직장인의 초상' 생생히 전달
원작 소설은 김 부장과 송 과장, 정 대리, 권 사원의 다중 시점으로 같은 사건을 네 번 반복하는 구조였다. 이러한 서사는 원작의 핵심 장치였고 세대와 계층 간 다층적인 시선을 모두 확보한다는 점에서 원작의 가장 도드라지는 묘사 방식이었다. 하지만 12부작 드라마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구조는 사라졌다. 김낙수 한 사람의 시점으로 압축하고 이야기 초입의 주요 갈등 요소였던 부동산 서사를 대폭 축소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가족 관계와 과거 회상을 확장하여 대체했다.
원작의 가장 큰 매력을 버린 각색은 위험이 큰 모험과 같다. 하지만 제작진은 선택의 대가로 집중력을 얻는다. 김낙수를 연기하는 류승룡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카메라는 김낙수의 얼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동기 허태환(이서환)의 울릉도 좌천 소식을 듣고 순간 굳어버리는 표정, 아들과의 대화에서 스쳐가는 당혹감. 여러 곁가지 대사들이 난무하기도 하지만, 류승룡은 대사를 뚫고 인물의 내면을 얼굴로 전달해낸다.
여기서 드라마는 원작 기반 웹툰의 만화적 장치들을 그대로 가져온다. 과장된 표정, 자막 효과, 상상 장면의 삽입. 이것이 종종 유치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드라마의 결을 해치지 않는 선에 그칠 수 있는 건 적절한 완급 조절 덕분이다. <김부장 이야기>는 가끔 50대에 부장 타이틀을 달고 있는 김낙수가 시대착오적인 행동을 보여주며 그것을 웃음의 동력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러한 장치들은 동시에 씁쓸함도 전가한다. 그것이 시대의 빠른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없는 50대 중년의 현실이기도 해서다.
원작의 다중 시점 포기는 서사적 깊이를 희생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그러한 선택이 이해갈 만한 선택이었음을 드라마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김낙수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구축하는 데 집중함으로써, 드라마는 50대 직장인의 초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50대에도 여전한 욕망의 비교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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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수는 백화점에서 가방을 고른다. 그의 기준은 명확하다. 팀원들의 가방보다는 비싸야 한다. 카메라는 그가 가격표를 확인하고 계산하는 와중에 고민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이러한 고민이야말로 드라마에서 김낙수가 놓인 위치를 상징한다. 드라마 속 김 부장은 정확히 중간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위를 올려다보며 눈치를 보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측정한다.
문제는 이런 측정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낙수는 서울에 자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지만 주변의 부동산 투자 대박 소식에 아쉬워한다. 비교 대상은 부동산 뿐만이 아니다. 뛰어난 능력으로 이른 나이에 부장 자리를 차지한 도진우 부장은 서초구 반포동에 산다. 건물주가 된 친구는 여유롭게 골프를 치면서도 돈을 극단적으로 아끼려는 행동을 보인다. 비교는 부러움의 대상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입사 25년 동기인 허태환이 울릉도로 좌천될 때 김낙수가 먼저 느끼는 감정은 동정이 아니라 좌천대상이 자신이 아니었음에 대한 안도다.
시도때도 없이 날아드는 비교에 드라마는 묻는다. 얼마나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 김낙수는 한국 사회가 정의하는 중산층으로서의 자리, 나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그런데 왜 그는 행복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비교의 구조에 있다. 김낙수의 자존감은 절대적 성취가 아니라 상대적 위치에 기반한다. 그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부장'이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규정하지만, 이 정체성은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서만 유지된다. 상무보다 아래, 후배들보다 위. 건물주 친구보다 아래, 전세 사는 동료보다 위. 이 측정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김낙수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다.
소통할 수 없는 중년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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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이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 김낙수는 회사의 믹스커피를 고집하는 사람이다. 인물의 검소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지난 세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는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내가 너희 나이 때는 말이야."
카메라는 후배들의 얼굴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송 과장, 정 대리, 권 사원의 표정은 떨떠름하지만 무표정에 가깝다. 고개를 끄덕이지만 눈빛은 딴 곳을 향한다. 김낙수의 조언은 진심일 수는 있겠지만 현 세대에게는 공감이 아니라 인내의 대상이다.
집도 다르지 않다. 김낙수는 아들 수겸(차강윤)에게 대기업 취업을 강요한다.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는 대기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겸은 스타트업을 꿈꾼다. 중학교 때 짝사랑했던 한나(이진이)가 소속된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한다. 김낙수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갈등은 가족 식사에서 연장된다. 김낙수는 주도적으로 말하지만 아내와 아들은 침묵하거나 수동적으로 그의 말을 공감해 줄 뿐이다. 아내는 더 이상 남편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준비하며 자신의 삶을 설계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흘려듣는다.
이러한 관계 설정을 통해 김낙수는 종종 홀로 놓인 것 같은 고독에 사로잡힌다. 혼자서 술을 마시고, 출장 나와서 외박을 하며 천장을 바라볼 때 그는 쓸쓸해한다. 50대 중년 남성 김낙수의 실존적 고독을 시각화한다. 그는 회사는 물론 가정에서도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한다. 그가 믿어온 가치관, 열심히 일하면 성공하고 성공하면 행복하다는 믿음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다만 드라마는 김낙수를 단순히 시대에 뒤쳐지는 꼰대로 희화화하려고만 들지는 않는다. 물론 그는 시대상으로 '꼰대'가 맞겠지만 그러한 고집이 자리잡힌 근원에는 '열심히 하면 승진한다',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지난 시대의 메시지가 있다. 한국 사회는 서울에 자가를 갖고, 남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인 대기업에 다니며, 아이를 명문 대학에 보내면 성공하는 삶이라고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으며 초지일관 전진했던 인물이 시대의 변화에 당황하고 고립감을 느끼는 이야기는 단순히 희화화의 대상으로 볼 수는 없다. <김부장 이야기>는 고립된 인물을 때로는 우습게, 때로는 측은하게 바라보며 현 한국 사회에 홀로 떨어져 있는 50대 중년들의 보편적인 고민을 수면 위로 띄우고자 한다.
이제 남은 질문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JTBC
4화까지 방영한 드라마는 한 가지 일에 집중했다.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김낙수는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뛰어난 영업 능력, 그리고 소통이 어려운 한계, 그의 주변에 자리잡은 불안과 질투를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김낙수는 50대 꼰대 중년인 동시에 입체적 인물이 되었다. 단순히 그를 혐오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는 캐릭터를 구축한 셈이다.
드라마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끝없는 비교와 경쟁, 상대적 박탈감의 메커니즘, 세대 간 소통 불가능성, 중년 남성의 실존적 위기. <김부장 이야기>는 김낙수 개인의 이야기인 동시에 한 세대의 집단적 초상이다. 실제로 드라마 방영 시점에 주요 대기업들의 희망퇴직 바람이 현실화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김 부장 동료의 울릉도 좌천 발령은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다. 남은 8화에서 드라마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김낙수는 변화할까, 이대로 추락할까.
원작은 명확히 재출발의 서사를 담고는 있다. 드라마도 같은 길을 선택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결말을 만들어 낼지는 모른다. 물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드라마만의 설득력이다. <김부장 이야기>는 김낙수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그릴 수 있을까? 그 변화가 설교처럼 느껴지지 않는,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김부장 이야기>는 대한민국 50대 중년 직장인의 초상을 그리는 데 성공했다.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 - 이 네 단어로 요약되는 성공이 더 이상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 드라마는 그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김낙수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과 불안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한 세대의 상징이다. 남은 8화가 이 질문들에 어떤 답을 줄지 지켜볼 일이다. 드라마가 쉬운 답을 선택하지 않기를, 현실의 복잡성이 단순화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이 찾게 될 답이 변화 혹은 수용, 그것이 아니면 저항이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의미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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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차 대기업 부장, 동기 좌천에 든 생각... 이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