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연기 키워, 상처는 적이 아닌 연료" 할리우드 '연기 코치' 처벅의 조언

[인터뷰] <배우의 힘> 저자 이바나 처벅, 첫 방한… 워크숍 앞두고 밝힌 '진짜 연기의 힘'

이바나 처벅(Ivana Chubbuck) 2025년 10월 21일 연기 코치 이바나 처벅이 서울 워크숍을 앞두고 인터뷰에 응했다.
이바나 처벅(Ivana Chubbuck)2025년 10월 21일 연기 코치 이바나 처벅이 서울 워크숍을 앞두고 인터뷰에 응했다.엘리스문

이바나 처벅(Ivana Chubbuck)은 샤를리즈 테론, 할리 베리, 브래드 피트, 제이크 질렌홀 등 할리우드 주요 작품에 참여한 다수의 주·조연 배우들과 장기간 협업하며 헐리우드 현장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 온 연기 코치이자 <배우의 힘(The Power of the Actor)>의 저자이다.

한국 도착 이튿날인 지난 21일 오후, 시차가 채 가시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피로를 감추지도 과장하지도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자신의 삶과 연기 철학을 차분히 설명했다. 인터뷰 내내 그가 반복해 붙든 단어는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그의 핵심 철학은 "감정→목적 지향의 행동"으로 요약된다. 장기·장면 목표 설정, 방해 요인 규정, 대체 이미지와 구체 행위 설계를 통해 감정을 추진력으로 바꾸는 구조를 채택한다.

"관객은 눈물이 아니라 의지를 본다"

가장 인상 깊었던 한국 영화로 처벅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꼽았다. 자본과 가족의 역학이 국경을 넘어 보편적으로 작동했다고 평가했고, 배우들이 장면마다 무엇을 얻기 위해 움직였는지가 또렷해 특히 뛰어났다고 덧붙였다.

처벅은 한때 배우였다. 그러나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제자리걸음하는 자신을 보며 방향을 틀었다. 그는 이렇게 정리한다. "감정이 크다고 해서 좋은 연기가 되지는 않습니다. 진짜 연기는 눈물이 아니라 의지에서 나옵니다. 배우는 울기 위해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이 체험은 곧 '처벅 기법(Chubbuck Technique)'으로 체계화됐다.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그 에너지를 행동으로 전환해 캐릭터의 목표(Objective)를 실현하도록 돕는 단계적 훈련이다. 처벅은 말한다. "관객은 배우의 눈물을 보러 오지 않습니다. 싸우는 인간을 보러 옵니다. 그 싸움 속에서 비로소 진짜 감정이 드러납니다."

감정에서 행동으로: 목적-장애물-행동의 구조

처벅은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심리학·행동과학을 공부하며 '사람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를 탐구했다. 그의 방법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캐릭터의 장기 목표와 장면별 구체 목표를 선명히 설정한다.
▲ 이를 가로막는 현실적 장애물을 규정한다.
▲ 목표를 향해 돌파하는 실행 가능한 행동을 설계한다.

감정은 결과적으로 행동을 밀어올리는 연료로 쓰인다. 처벅은 "관객이 사랑하는 것은 '큰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라며 "좋은 연기는 '느끼는 연기'가 아니라 이기는 연기"라고 규정한다.

"좋은 배우는 인간을 탐구하는 심리학자"

처벅은 개인사도 숨기지 않았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던 어머니,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아버지, 어린 시절의 폭력과 혼란을 언급하며 "죽음을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살아내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해법은 상처를 없애려 애쓰기보다 분노·불안·우울을 관찰하고 행동의 에너지로 돌리는 훈련이다. 그래서 <배우의 힘>은 연기자만을 위한 지침서에 그치지 않고, 삶을 다시 세우는 기술서로도 읽힌다.

처벅에게 연기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 이해의 과정이다.

"좋은 배우는 인간을 관찰하는 사람입니다. 연기란 인간의 행동을 탐구하는 심리학입니다. 배우가 자신의 상처를 캐릭터의 목표로 바꿀 때, 그 연기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는 연기자에게 필요한 것을 '진정성'의 선언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심을 입증하는 용기라고 강조한다. "진심은 말이 아니라 선택에서 드러납니다. 배우는 그 선택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첫 한국 방문, 한국 배우들 그리고 한국의 청년에게

 10월 23일 처벅코리아 마스터클래스 중 이바나 처벅과 엘리스 문 QnA 세션.
10월 23일 처벅코리아 마스터클래스 중 이바나 처벅과 엘리스 문 QnA 세션.엘리스 문

이번 방한은 처벅의 첫 한국 일정이다. 그는 배우·감독·작가가 함께 참여하는 현장 워크숍을 진행한다. 참가자들은 대본을 바탕으로 목표 설정-장애물 규정-행동 설계를 단계적으로 적용해 한 신을 실제로 빚어 보고, 질의응답을 통해 각자의 난제를 '감정의 재연'에서 '행동의 조직'으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친다. 처벅은 "기술은 책에서 시작되지만,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완성된다"고 강조한다.

최근 세계적 주목을 받는 한국 작품들에 대해 처벅은 "한국 배우들은 깊은 감정과 섬세한 내면을 지닌 훌륭한 예술가들"이라고 평가한다. "강점인 진정성 있는 감정을 행동의 에너지로 전환한다면, 세계 어디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인터뷰 도중 한국의 높은 자살률 통계를 전해 듣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십 대와 이십 대가 겪는 절벽을 압니다. 감정을 지우려 하기보다, 살아내기 위한 행동으로 바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처벅은 끝으로 이렇게 당부했다.

"연기는 삶보다 크지 않습니다. 삶이 연기를 키웁니다. 당신의 상처는 적이 아니라 연료가 될 수 있습니다. 감정을 흘려보내지 말고, 행동으로 전환하십시오."

인터뷰 내내 처벅은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어조로 답했고, 현장에서의 따뜻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창밖의 빛이 옅어졌지만, 그의 문장은 오래 잔향을 남겼다. 목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의지-그가 말한 '배우의 힘'은 결국 인간의 힘에 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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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계사가 나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임을 깨닫고 몸으로 시대를 느끼고, 기억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