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놀이 가자는 딸, 암 말기 엄마는 갈 수 있을까?

[넘버링 무비 526] 영화 <꽃놀이 간다>

 영화 <꽃놀이 간다> 스틸컷
영화 <꽃놀이 간다> 스틸컷필름다빈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엄마 당장 나가자. 내가 살려줄게. 우리 엄마 당장 퇴원시켜 주세요!"

수미(이정현 분)는 비장한 걸음으로 병실로 들어와 입원해 있던 엄마(김봉희 분)를 다짜고짜 퇴원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엄마는 혼자서 거동도 불편한 상태지만 자신이 홀로 돌볼 수 있다며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실제로는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어 영양제를 투여받아야 하지만 그 또한 돌팔이 병원 측의 상술이라며 난동 부린다. 보호자인 딸의 강력한 의지에 의료진은 어쩔 수 없이 물러서고 만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벌써 1000만 원이나 가까이 밀린 병원 수납 요금과 앞으로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 현실의 문제다.

영화 <꽃놀이 간다>는 그동안 독보적인 캐릭터로 자신만의 다채로운 경로를 그려온 이정현 배우가 직접 쓰고 연출하며, 스스로 주연까지 맡아 출연한 작품이다. 약 2년 전 촬영된 이 작품을 자신의 첫 연출작으로 선택한 배경에는 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중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있었다. 암 말기임에도 불구하고 꽃놀이를 떠나고 싶어 했던 당신과 병원으로 모시고 와 항암치료를 받게 했던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 속에 투영하고 담아냈다. 단순한 추억담은 아니다. 여기에 지난 2022년, 창신동에서 고독사로 숨진 뒤 뒤늦게 발견된 두 모자의 이야기에서 얻은 영감을 더하며 사회의 단면까지 비추고자 했다.

02.
언제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벼운 믿음은 '그때'를 허락하지 않는 시간의 단호함에 종종 깨지곤 한다. 영원할 것만 같은 현재의 시간과 계속해서 이어질 것만 같은 관계가 우리로 하여금 미루고 다음을 기약하게 만들어서다. 영화가 바라보고자 하는 자리가 여기에 있다. 사실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어머니를 병원에서 퇴원시켜 집으로 데리고 오는 딸의 이야기는 서사적으로 무척이나 가벼워 보인다. 그 단순함 속에 감춰져 있는 돌봄의 문제와 유예한 약속들, 제대로 꺼내지 못한 감정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그렇다.

이를 시각적으로 구조화하기 위해서 영화는 돌보는 사람, 수미의 모습과 정서를 극의 중심에 두고자 한다. 돌봄의 대상이 되는 엄마가 거동이 불편하고 병세가 악화되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프레임 속에 한 인물이 홀로 서 있게 된다는 뜻은, 영화가 마련해 둔 모든 압력을 오롯이 감당해내야 한다는 뜻과 동일하며, 해당 인물이 쌓아가는 감정적 층위를 이미지적으로 구현해 관객들에게 전달하겠다는 의지나 다름없다.

 영화 <꽃놀이 간다> 스틸컷
영화 <꽃놀이 간다> 스틸컷필름다빈

03.
"엄마 이제 다음 주에 꽃놀이 갈 수 있겠다."

가장 현실적인 압력은 역시 경제적인 부분이다. 병원 전산 시스템에 기재된 체납금은 물론 방안 화장대 위에 어지럽게 쌓인 각종 공과금 용지는 다 쓰러져 가는 오래된 집을 보여주기 전부터 수미의 사정을 드러낸다. 팔리지도 않는 집 때문에 기초 수급 대상자로도 등록될 수 없고, 심지어 팔려고 내놓은 집은 그마저도 경기 침체로 묶인다. 병원 브로커까지 수소문해 엄마에게 필요한 영양 수액을 구해보려고 하지만, 그조차 여의치 못하다. 이 영화에서 수미가 엄마를 위해 도토리묵을 사와 먹이는 장면까지는 등장하지만, 자신의 입에 무언가를 넣어 삼키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수미라는 인물을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방식은 사랑했던 존재에 대한 안쓰러움을 극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끝까지 보살펴야 한다는 일종의 부담감과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절망 사이에 가둬놓는 일이다. 이때 등장하는 버스정류장 가벽에 붙은 설악산 꽃놀이 홍보 전단과 이를 위해 마련한 성인가요 휘파람 메들리 테이프는 그곳에 놓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수단으로 남는다. 의식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엄마를 위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04.
그렇게 영화 속 '꽃놀이'는 일종의 희망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끝이 결정되어 버린, 관용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모습을 하게 된다. 끝내 극복할 수 없을 경제적 상황과 더불어,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시되는 수미의 절망, 성당 고해성사실에 숨어 몰래 쏟아내는 슬픔, 늦은 시각 한강 다리 위에서 자신을 내던지고자 하는 심리적 갈등 등의 장면은 영화가 그 무책임함을 단죄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지만, 어떤 이도 온전히 피할 수 없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사각을 그렇게 보여주는 것이다. 현실을 이끌 수 없는 말이 얼마나 큰 죄책감이 되어 다시 돌아오게 되는지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알 수 있게 된다.

'꽃놀이 가자'는 말은 그렇게 차가운 마음이 되어 수미에게 남는다. 이제 그는 체납된 미납금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입원을 고려하는 병원의 눈치만 살피다 도망치고 말고, 엄마의 약을 먹이기 위한 알람이 울리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망부석이 되고 만다. 계속해서 부딪히고 깨지기만 하는 세상에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무력한 한 사람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복지 문제와 돌봄 노동자들의 현실, 사각에 놓인 이들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영화 <꽃놀이 간다> 스틸컷
영화 <꽃놀이 간다> 스틸컷필름다빈

05.
영화의 마지막에는 장치 하나가 마련된다. 그동안 쌓아온 감정을 가장 차가운 형태의 슬픔으로 치환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현실의 문턱을 넘지 못한 한 개인의 비극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이지만, 한편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돌봄, 유예된 사랑의 또 다른 형태와 미뤄진 약속이 남기고 간 시간의 그림자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거듭되는 절망과 자기 부정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존재의 곁을 떠나지 않는,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돌봄이 이 장면 위에 온기처럼 덮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꽃놀이 간다>는 그러니까, 끝내 닿지 못한 마음들이 어떻게 풍경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정현은 배우로서가 아니라, 어쩌면 더 이상 무언가를 연기할 수 없을 때, 스스로 꺼내놓은 가장 사적인 장면들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연출의 완성도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한 사람이 품은 죄책감과 사랑, 말하지 못한 언어들이 정서의 여백으로 번져나가는 드문 작품이다. '꽃놀이'는 결국 가지 못한 장소가 아니라, 계속해서 미뤄지다 사라진 관계의 시간을 의미한다. 감독이 붙잡아 보여주고자 했던 건 그 시간이며, 관객은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이 영화는 끝내 실현되지 못한 한 장면의 현상으로, 관객의 마음속에 자리하게 될 것이다.
영화 꽃놀이간다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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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