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6마리의 눈을 찌른 소년 '알런 스트랑'과 소년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트'를 중심으로 신과 인간, 열정과 광기, 원시적 욕망 등의 다양한 화두를 던지는 명작 <에쿠우스>가 돌아왔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10월 3일부터 약 4개월에 걸친 대장정에 돌입했다. 50년이라는 세월에 걸맞게 <에쿠우스>는 그동안 신구, 정동환, 박정자, 송승환 등 한국 연극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배우들이 거쳐갔다.
스무 살 무렵 <에쿠우스> 희곡을 읽으며 연기에 발을 들였고, 2014년 객석에서 <에쿠우스>의 강렬함에 빠져들어 그 해에만 13차례 공연을 본 소년이 서른이 넘은 지금 배우로 <에쿠우스> 무대에 오른다. <에쿠우스> 50주년 기념 공연의 '알런 스트랑', 배우 이충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난 29일 <에쿠우스>가 공연되고 있는 서울 종로구 예그린씨어터에서 배우 이충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연극 <에쿠우스>의 알런 스트랑 역을 맡은 배우 이충곤
극단 실험극장
사실 배우 이충곤은 2018년 <에쿠우스>와 연이 닿은 바 있다. 생애 첫 연극 오디션으로 자신이 그토록 꿈꿔왔던 <에쿠우스>에 도전했고, 진심이 통했는지 알런 역으로 최종 합격했다. 하지만 자신의 연기가 작품과 배역의 무게, 그리고 작품을 향한 자신의 애정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한다.
"제가 <에쿠우스>를 너무 사랑하다 보니까 '내가 폐를 끼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어요. 그래서 (이한승) 연출님께 제가 이 역할을 맡을 능력을 갖춘 후에 저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연출님 입장에서는 작품에 차질이 생기는 걸 감수하시면서도 제 의견을 들어주셨어요."
작품을 사랑한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하차를 결심한 이후 7년이 흘렀다. 그 사이 <에쿠우스>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이충곤은 관객으로 극장을 찾았다. 홀로 지방 공연을 쫓아다닐 정도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고, 그동안 다양한 작품을 소화하며 연기를 갈고 닦았다. 그렇게 2025년,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작품의 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에 함께하게 되었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글이다.
에쿠우스만을 기다려온 이충곤의 진심
- 오랜 준비 끝에 <에쿠우스>에 참여하시게 된 소감이 궁금합니다.
"2018년의 하차를 늘 후회했어요. 다시 <에쿠우스> 무대에 오르기 위해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리자는 마음 하나로 7년을 준비했습니다. 계속 <에쿠우스>를 쫓아다니기도 했고요. 혼자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지방 공연도 찾아갔어요. 이번 공연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이 작품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 절실히 임했어요. 오디션을 보면서 실제로 단 한 번만이라도 <에쿠우스> 공연을 할 수 있다면, 오직 그 순간만 생각하고 참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연출님께서 이런 열정을 보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 같아요. 저로서는 영광스러울 따름이죠."
- 20대에 만난 <에쿠우스>와 30대가 되어 만나는 <에쿠우스>는 어떻게 다른가요?
"<에쿠우스>가 가진 강렬함에 압도 당해 이 작품을 사랑하기 시작했어요. 이 작품을 꼭 하고 싶다는 꿈과 확신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사실 작품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아무리 공부하고 찾아봐도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 알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30대 중반이 되어가면서 이 작품이 어떤 걸 말하려고 하는지 조금씩 깨달아요. 인간에 대한 화두들을 정말 많이 던지고 있고, 지금 연기를 하면서도 저라는 사람에 대해 계속 되돌아보게 합니다."
▲연극 <에쿠우스> 공연 사진
극단 실험극장
- 배우님이 연기하시는 '알런 스트랑'은 어떤 인물인가요?
"말들의 눈을 찌른 뒤 재판을 받고 세상 사람 모두에게 정신병 소년으로 취급되는 인물이에요.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슴 안에 뜨거운 정열을 가진 친구죠. 온갖 억압 속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그 안에서 정열을 터뜨리는 인물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정열 때문에 본인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하고요. 저는 알런을 보면서 뜨거운 정열과 함께 외로움, 그리고 광기와 집착 이면에 숨겨진 사랑받고 싶어하는 순수한 마음을 느껴요."
- 알런이 자신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를 처음에는 경계하다가 조금씩 마음을 여는데요, 그 계기는 무엇일까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의 억압 속에서 그동안 알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말들의 눈을 찌른 후에는 다들 정신병 소년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처음에는 다이사트도 다른 어른들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유일하게 다이사트만이 알런에 대해 궁금해하니까 경계를 조금씩 풀어가게 되는 거죠. 알런은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있고 들어주는, 그리고 본인을 진심으로 봐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극중에 알런이 악몽을 꾸다가 다이사트를 마주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이때 알런은 자신의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을 들킨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서 경계심이 생겨 '나도 내 얘기를 할 테니 너도 네 얘기를 해봐' 했는데, 다이사트도 자기 꿈 얘기를 해주거든요. 이렇게 조금씩 다이사트를 시험하기도 하면서 마음을 열어갑니다."
- 작품의 가장 상징적인 소재가 말인데요, 알런에게 말은 어떤 존재인가요?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해요. 신앙, 본능, 인간의 욕망, 그 모든 것들이 말에 담겨있어요. 예전에는 저도 공연을 보면서 알런에게 집중해서 봤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지금 무대에서 직접 연기하면서 말들이 정말 강렬하게 다가와요. 뿐만 아니라 배우로서 말을 연기하는 동료 배우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말 역할의 배우들이 연습 과정에서부터 정말 공을 많이 들였거든요. 사실 말이 없다면 알런은 빛을 볼 수 없거든요. 그래서 언제나 말 역할을 하는 동료 배우들이 존경스럽고, 힘이 닿는 한 많이 챙겨주려고 노력해요."
▲연극 <에쿠우스> 공연 사진
극단 실험극장
"단 한 번이라도 알런이 될 수 있다면"
- 배우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장면과 대사는 무엇인가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말과 한몸이 되어 들판을 달리는 1막 엔딩입니다. 카타르시스 그 자체죠. 대사 중에서는 '나도 카우보이였다면. 그늘은 자유로워 마음껏 달리지. 끝없는 평야를'이라는 대사를 가장 좋아해요. 다이사트로부터 받은 녹음기에 대고 혼자 길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여기서 자신이 카우보이이고 싶다고 말하거든요. 알런이 바라본 카우보이는 서부 활극에 나오는 자유로운 존재였을 테고, 바로 이 대사를 통해서 자유를 향한 알런의 갈망이 크게 느껴져요."
- 알런을 연기하기 위해 신경 쓰신 부분이 있을까요?
"체중 감량을 많이 했어요. 볼이 움푹 패인 소년이라는 묘사가 나오거든요. 또 말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목마를 타야 하니까 말 역할 배우들의 부담을 덜어줘야 하기도 했고요. 알런의 외형을 충실하게 묘사하면서도 탄탄한 말들과 대비될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내면적으로는 제가 종교가 없어서 알런의 신앙적인 면을 이해하기 어려웠거든요. 알런을 이해해보기 위해 명동성당 가서 미사도 드려보고, 교회에서 예배도 드려봤어요. 예수에 관한 영화도 많이 찾아봤습니다. 또 승마장에 가서 말과 교감도 시도해보고, 말을 관리하시는 분들과 이야기도 나눠봤어요. 그렇게 알런의 내면을 채워갔죠."
- 주변으로부터 도움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연출님과 선생님들께서 많이 신경 써주셨어요. 또 같이 알런을 연기하는 김시유 배우가 도움을 많이 줬어요. 특히 '대본 다시 봐'라는 시유의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제가 알런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대본 다시 보라는 시유의 말 한 마디가 그 어떤 얘기보다 너무 많은 답을 알려주고 있더라고요. 공연을 하는 지금도 매번 대본을 다시 읽어요."
- 알런에게 말은 전부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배우님에게 그런 존재가 있다면요?
"<에쿠우스> 작품이요. 배우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저의 최종적인 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정말 단 한 번이라도 알런으로 무대에 설 수 있다면 다른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었어요. 그래서 더 간절하게 준비했고, 지금도 책임감을 강하게 느껴요. 제게 도움을 주신 연출님과 선생님들께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에쿠우스>는 상징적인 요소가 많은 다의적인 작품이에요. 작품이 던지는 여러 화두들 중에서도 저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고, 인간다움에 관해 질문해볼 수 있는 작품으로 관객 분들께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또 배우이기 이전에 한 청년으로서, 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신 극단 실험극장 이한승 대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배우 이충곤은 지금도 매번 자신의 부족함을 느낀다고 했다. 공연을 한 날에는 그날 공연을 복기하느라 쉽게 잠에 들지 못할 정도다. "부족함을 매회 채워가야 하는 책임감을 크게 느낀다"는 그의 말에서 작품을 향한 애정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충곤의 <에쿠우스>는 현재 진행형이다.
▲연극 <에쿠우스> 공연 사진극단 실험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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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우스'는 내 최종 꿈" 너무 사랑해 하차한 작품 7년 만에 맡은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