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이 직접 쓴 독특한 영화, 절반의 성공

[김성호의 씨네만세 1206] <에스퍼의 빛>

영화가 무엇인가의 경계가 갈수록 흐릿해져 간다. 경계가 흐릿해져 가는 건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현상일 뿐이다. 경계가 흐릿해져 외부의 것이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그로부터 안의 것을 따로 규율할 의미가 희석되기도 한다. 존재의 확장과 소실의 전 단계에서 경계가 흐릿해져가는 현상은 자연스레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오늘날 영화의 상황이 꼭 그러하다.

한때는 한 명의 작가가, 또 작가집단이 하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영화가 문학의 영상적 재현일 뿐이라 주장하는 이가 다수였던 시절도 꽤나 길었다. 어찌됐든 영화는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통하여 보는 이를 감화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상업영화의 문법이 자리 잡고 장르영화의 구분이 분명해진 때에도 이야기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다. 간명하고 노골적일지라도 관객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영화의 근간이라고들 이야기되곤 했다.

그와 같은 인식에 정면으로 맞서는 작품군이 있다. 일단의 실험영화들이 대표적이다. 영화가 여기까지는 아니라고, 영화의 경계 바깥에 선 말뚝을 뽑아 저 너머로 옮기겠다는 작품들이다. 그 대부분이 실패했을지라도 모든 시도가 실패한 건 아니다. 돌아보면 흑백에서 컬러로, 무성에서 유성으로, 스튜디오 안에서 바깥으로, 스턴트에서 특수효과로, 우리가 영화의 진보라고 불러온 많은 사건이 한때는 실험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에스퍼의 빛 스틸컷
에스퍼의 빛스틸컷시네마토그래프

호불호 갈리는 화제작

<에스퍼의 빛>은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품이다. 왜 아닐까. 영화가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그 근간이라 해도 좋을 이야기를 실험적 시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겠다. 출연한 청소년들이 직접 집단적으로 각본을 썼다는 점에선 미야케 쇼의 2019년 작 <와일드 투어>와의 접점도 있다. 청소년 미디어교육이나 세대 간 교류 차원에서 비슷한 시도가 영화와 연극이란 매체를 통해서도 종종 이뤄지는 가운데, <에스퍼의 빛>은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란 영화 바깥의 방식을 받아들여 저만의 특색을 발한다.

TRPG는 PC게임이나 보드게임 류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게임의 형식이다. 서로가 맡은 바 역할을 연기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자유도가 높은 게임으로 분류된다. 영화가 창작된 과정은 마치 여러 작가며 커뮤니티 이용자가 한 문장이나 한 단락씩 이어가며 소설을 쓰는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기본적인 세계관만 고지한 뒤 출연한 청소년 배우들이 트위터를 통해 직접 대사와 선택, 그에 깔린 이유 등을 써내려간 것을 바탕으로 모두 3개의 장으로 구성된 한 편의 장편을 만들었다.

통상적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느낌과 감각이랄까. 극작 비전문가인 참여자 각각이 창조한 캐릭터의 분명한 인상과 여러 캐릭터가 서로 교차하며 빚어지는 우연적 분위기가 영화의 주를 이룬다. 배우들 또한 숙련되거나 기량이 있는 이들이 아니어서 다소 어색하거나 표현의 층위가 깊지 않다는 인상이 남을 수 있겠다. 여러모로 낯설고 투박하며 난해하고 모호한 작품이다. 그래서 재미가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딱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라 느끼기 십상이다. 이런 프로젝트를 어째서 진행했는지, 그 프로젝트에 의미가 있는지, 그에 대한 의견이 곧 영화에 대한 감상과 이어질 밖에 없다.

에스퍼의 빛 스틸컷
에스퍼의 빛스틸컷시네마토그래프

게임과 영화의 독특한 만남

그럼에도 영화는 비평가 집단 내부에선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시도의 성패며 가치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릴 수 있겠으나 적어도 전위적 실험이며, 영화의 경계를 탐색하고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는 작품이란 점에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지난해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판타스틱 작품상을 위시해 여러 영화제서 주목받은 이 영화는 1년 만인 올해 신생 배급사 시네마토그래프를 통해 극장개봉 기회까지 잡았다. 이제 일반 관객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이다. 한국 독립영화, 그것도 실험적 성격을 가진 작품이 극장에 걸리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돌아보자면, 배급시도 자체 또한 한국 영화계의 의미 있는 걸음이라 해도 좋겠다.

구태여 말하자면 장르는 판타지다. 제목인 '에스퍼의 빛'에서 말하는 희미한 빛, 그 빛을 찾는 과정이 영화의 주된 목적이라 이해할 수도 있다. 환상적 세상, 열 명쯤 되는 10대 청소년들이 모든 이야기가 현실이 될 수 있는 독특한 세계를 살아간다. 리산시티, 알스트로에메리아 숲, 아수아섬 등 비현실적 이름을 가진 공간들을 배경으로 마치 롤플레잉게임을 하는 듯한 선택지가 중간중간 등장하며, 이들의 선택을 통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에스퍼의 빛 스틸컷
에스퍼의 빛스틸컷시네마토그래프

청소년이 참여한 실험적 프로젝트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설정이 아닌가 싶게 시작한 영화는, 쫓고 쫓기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침탈과 탄압, 혹은 환대받지 못하는 이주자적 감성 또한 곳곳에서 드러낸다. 그러나 그중 무엇도 심도 있는 서사로써 구현되지는 못하는데 비전문가인 청소년들이 집단적으로 창작한 결과물의 어찌할 수 없는 귀결일 테다.

아쉬운 건 실험적 프로젝트로부터 다다르고자 했던 지향이 거의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과물로부터 이 독특한 작법을 택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포착하기 어렵다. 창작자는 영화의 경계 너머를 탐색하려는 목적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목표와 동기, 그를 달성하기 위한 창작자의 고찰을 나는 도무지 읽어낼 수 없었다. 오로지 난해하고 모호하며 당혹스럽다는 이유로, 그러니까 흔히 마주하기 어려운 실험이라는 이유로 작품을 고평가하는 행태에 나는 반대한다. 이는 백수십 년 전 나온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끝났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기다리게 된다. 오늘의 한국 관객이 <에스퍼의 빛>을 마주하고 내어놓는 감상에 대하여. 그러니까 이 시대 작가와 그에 참여하고 연기한 여러 플레이어들과 오늘의 수용자, 그리고 영화를 보고 글을 적는 나까지가 한 테이블에 각자의 역할을 안고 마주하여 나누는 대화와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TRPG의 영화적 구현은 그래서 영화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는 안 된다. 영화란 무엇이고, 어디까지 뻗쳐 나갈 수 있으며, 그리하여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오늘의 한국 영화와 관객들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에스퍼의빛 시네마토그래프 정재훈 지대한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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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