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인공지능(AI)의 세기다. GPU(그래픽 처리장치, Graphics Processing Unit) 등 AI 가속기의 어마어마한 발전속도가 보여주듯, AI 성능향상은 인간의 감각과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아무리 늦어도 2년마다 새로운 세대가 출시되고 있는 가속기는 AI가 여러 산업 부문에서 경악할 만한 성취를 해내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실리콘밸리의 AI 산업 선두주자들이 다가올 산업 생태계의 패권을 쥐기 위해 그야말로 총력전을 벌인 결과다. 바둑계에서 이세돌을 격파한 알파고는 AI의 역사에서 이미 청동기 시대 모델이나 다름없다. 물리와 화학, 의료와 경제, 심지어 예술과 문화, 군사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을 지탱해온 거의 모든 분야가 AI를 통한 혁명적 변혁과 마주하고 있다.
전대미문의 사태에도 AI에 대한 전망은 장밋빛이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장밋빛 전망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해도 좋을 정도다.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으로 대표되는 빅테크 기업과 이들의 기술을 활용해 각 산업 영역에서 혁신을 거듭하는 스몰테크 기업의 신화가 금융과 투자, 또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며 장밋빛 전망을 확산하는 매커니즘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어디 좋은 것만 있을까. 인류가 그 어느 때보다 위기와 마주했다 말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모두가 인류를 새로운 장으로 데려다 줄 혁명이며 혁신이고 동반자라 말하는 AI가 실은 인류를 파괴하는 재앙이라 말하는 이들, 그 전망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도 있는 것이 아닐까.
▲부고니아스틸컷
CJ ENM
할리우드가 리메이크한 한국영화
<부고니아>는 세계적 거장이라 불러 마땅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 영화다. 2003년 작 한국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해 제작 전부터 화제가 됐던 작품으로, 감독이 요르고스 란티모스로 확정되고 작품이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 호평을 받으며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켰다. 올해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서도 연일 매진행렬을 벌인 이 영화가 마침내 개봉해 제 모습을 드러내니 이 시대 영화팬을 자임하는 이 치고 극장을 찾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구를 지켜라!>가 어떤 영화였나. 장준환이 연출하고 홍경표가 촬영을 맡았으며 신하균과 백윤식이 주연한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괴작으로 기록됐다. 수많은 평론가가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설정과 전개, 결말과 연출을 극찬했고, 아쉬운 흥행성적에도 불구하고 일단의 팬들은 오래도록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영화가 나온 지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영화 가운데 최고의 데뷔작을 논할 때 이 영화가 언급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가 세계적 감독이 연출하고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스타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으로 재탄생한다는 건 다분히 놀라운 일이다. 란티모스와 같은 작가라면 그저 똑같은 작품을 새로이 만드는 데 그칠 리가 없을 터다. 원작의 좋은 점을 가져오면서도 시공간을 달리하여 저만의 매력을 추가한 결과가 <부고니아>를 이루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부고니아스틸컷
CJ ENM
덜 떨어진 두 남자가 납치한 대기업 회장
<부고니아>는 <지구를 지켜라!>의 틀을 고스란히 따른다. 다만 그 성격에서 약간의 코미디와 SF적 요소를 제하고, 보다 진지한 부조리극의 요소를 부각한다. 주인공은 사촌 도니(에이단 델비스 분)와 함께 사는 청년 테디(제시 플레먼스 분)다. 평일엔 물류회사에 출근하고 틈틈이 집 뒤편의 양봉장에서 벌을 키우며 성실히 살아가는 이다. 동생인 도니는 경계선 지능장애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를 독려하여 몸을 단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영화는 조금씩 진면목을 드러낸다. 테디가 도니와 함께 운동을 하고 틈틈이 제 사상을 주입하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그는 인류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믿는다. 꿀벌들의 군집이 붕괴되는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며 식물의 생식이 위험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은 그 원인이 무엇이라 특정하지 못하지만, 테디는 그 근간에 제초제와 같은 화학약품의 남용과 그를 주도하는 기업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중 선도격인 기업이 바로 테디가 일하는 물류회사를 가진 대기업이다.
미셸(엠마 스톤 분)은 그렇게 테디와 도니의 타깃이 된다. 미국의 흔한 음모론자와 지적 능력이 부족하여 그를 따르는 외톨이로 보이는 두 사람이 극단적 범죄에 이른다는 설정은 적잖이 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공익보다는 사익을 중시한다는 이유로, 또 국가를 지탱하는 체제적 모순을 고발하고 책임을 묻기 위하여 특정인을 치밀하게 계획해 살해하는 사례가 실제로도 발생하는 때문이다.
▲부고니아스틸컷
CJ ENM
선망 받는 기업인과 기피 대상 외톨이
테디의 범죄도 얼마간 그와 맥락을 같이 한다. 다만 차이라면 그의 판단은 그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저항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단 점이다. 그는 미셸이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확신한다. 일단의 외계인들이 지구에서 인간처럼 위장하고 정보를 모은다는 음모론을 믿고서 그 뿌리를 캐온 게 하루 이틀은 아닌 모양이다. 그중에서도 분명한 표적 미셸을 납치하기로 결정하니, 그저 죽이는 것이 계획이 아닌 것이다. 그로부터 영화는 테디가 도니의 도움을 받아 미셸을 납치하는데 성공하고, 그를 고문하여 우주선에 올라 인류 대표로 협상을 하겠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진전시켜 간다.
마치 지구평평설을 믿는 가난하고 어리석으며 고립된 미국 시골 백인의 이미지가 테디에게 그대로 투영돼 있다. 후줄근한 셔츠를 입고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테디는 마을에서도 외톨이로 지낸다. 평균보다 못한 지능의 도니와 함께 사는 그는 공동체의 관계망에서도, 사회적 구조에서도 도태되고 고립돼 있다. 반면 미셸은 온갖 잡지 표지에 등장하는 성공한 기업인이자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각종 매체를 통해 활발히 소통하는 사람이다. 그가 운영하는 기업의 실상이 어쨌건 간에 남에게 보여지는 모든 부분은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세련됐다.
영화가 근무시간 단축에 대해 지시하는 미셸의 태도를 다분히 풍자적으로 비추는 덴 분명한 의미가 있다. 미셸은 뛰어난 경영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지만, 정작 그녀가 그만한 역량 있는 인물이며 가치를 생산하는 기업인인지를 영화 안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시대적 분위기에 발맞춰 근무시간을 조정할 줄 아는 기업인으로서의 이미지만이 중요할 뿐, 그 안에 담긴 철학이며 그를 실현할 수 있는 전략 같은 것은 그녀에겐 전혀 관심 없는 일이다. 그로부터 빚어지는 우스꽝스런 상황이 오로지 겉모양, 재산과 연봉, 외모와 말솜씨 따위만 추종하는 오늘의 세상을 풍자하는 것이다.
이 극명한 대비는 테디의 어리석은 범죄와 무고하게 고통 받는 미셸의 상황을 더욱 증폭시키는 설정으로 작용한다. 음모론자이며 편집증적 광인인 테디가 선량할뿐더러 사회에 유익한 이를 괴롭히는 범죄극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선입견이 굳어질수록 영화가 이를 뒤집을 때의 효과 또한 커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이 영화 <부고니아>가 의도한 바가 된다.
▲부고니아포스터CJ ENM
특이점 맞이한 인류 문명, 그를 돌아보게 한다
테디의 절박함은 영화 속 사회 구성원은 물론, 영화 바깥 관객에게도 거부당한다. 그러나 그의 위기감이 사실로 드러날 때, 확인되는 것은 관객의 안이함이자 잘못된 확신인 것이다. 인류 멸절을 막으려 했던 경고가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면 그것은 경고하는 이의 문제만은 아닐 테다.
대체 무엇이 인간을 오판으로 이끄는가. 무엇이 수많은 동식물을 멸종케 하고, 꿀벌군집을 붕괴시키며, 마침내는 지구의 균형을 잃도록 하는가. 영화 밖 인간이 걸어온 길이 잘못됐다면, 우리 중 누가 그 길을 막아서려 했는가. 또 지금 인류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인류가 향하는 그곳은 번영의 길인가, 몰락의 길인가. 이 같은 질문들이 영화의 반전을 통하여 비로소 수면 위로 올라온다.
영화의 반전은 오늘의 세상에서 23년 전보다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이끄는 대로 끌려온 오늘이 아닌가. 그 결과로써 전에 누려본 적 없는 풍요와 기술적 진보를 인류는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꿀벌 군집이 깨져나가고 식물의 수분이 더는 왕성히 이뤄지지 않는 것만큼이나 인류는 커다란 격변과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AI 기술과 같은 특이점은 이제껏 인간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강제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가져온 모든 영광이 그러했듯, 우리는 그 결과물을 알지 못한 채로 새로운 세상과 대면할 것을 강요받는다.
테디와 같은 소수는 그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금융과 산업이, 정치와 군사가 새로운 기술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라 할 때에도,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본질적 문제를 돌아보길 청한다. 유발 하라리와 같은 인문적 배경을 가진 석학들이 그 위험을 경고하고 휴지기를 청하지만, 멈추면 돌이킬 수 없다 여기는 기업과 그 밑바탕이 되는 과학기술자들은 제가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그 끝이 <부고니아>의 충격적 결말과 겹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건 왜일까. 세련되지 못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만 하던 테디가 다른 이들보다 진실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오로지 우리들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영화 속 인간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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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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