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가운데 신비로운 섬 하나가 등장한다. 대양을 건너는 배가 침몰하며 벵골호랑이와 함께 바다 가운데서 표류하던 파이다. 목마름과 배고픔에 대항하여 겨우겨우 목숨만은 보존한 뒤 파이는 떠밀리듯 한 섬 가장자리에 닿는다. 미어캣으로 가득한 이 섬에는 배를 채울 수 있는 해초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맑은 물이 절로 솟아나는 웅덩이까지 있다. 부족한 것 없는 낙원이 바로 이곳인가 싶다. 어쩌면 일생을 이 섬에서 보내도 좋겠다고, 그런 생각에 이르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 먼 바다, 항해라고 할 수 없는 표류 가운데서 기약 없는 고난을 겪어온 파이가 아닌가.
그러나 그 섬은 생각과는 달랐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발 디딜 땅 없는 섬은 온통 나무줄기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뿌리를 내린 곳도 알 수 없는 가지만 얽히고설킨 섬. 맹그로브 나무로 이뤄진 이 섬은 실제에선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하고 환상적인 생태를 이루고 있다.
이 섬엔 비밀이 있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낮의 모습은 간데 온데 없이 사라지고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담수였던 연못은 산성으로 바뀌고 식물들도 사람을 잡아먹는다. 파이는 식물 안에서 사람의 치아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닫는다. 마침내 섬을 벗어나 돌아보니 섬은 힌두교 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듯도 하다.
거북선 탄 세 사내의 무인도 표류기
▲바얌섬스틸컷
필름다빈
<바얌섬>은 2023년 있었던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섹션에 초청돼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을 받은 작품이다. 영화는 올 가을 한국독립영화로선 드문 개봉기회를 잡아 극장서 관객들과 만나게 됐는데, 2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작품을 기다리는 독립영화팬의 관심이 일고 있다. 신예라 해야 좋을 감독 김유민에 더하여 출연한 이상훈, 김기태, 이청빈, 전희연 등의 배우도 영화판에선 새로운 얼굴들이라, 한국영화계에 새 바람이 일길 기다리는 이들에겐 반가운 소식이라 하겠다.
<바얌섬>의 제목인 '바얌섬'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공간이다. 여러모로 글 서두에 언급한 <라이프 오브 파이> 속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섬을 떠올리게 하는데, 실제 도입부터가 그러하다. 몽휘, 창룡, 꺽쇠란 이름의 세 사내가 이 섬 백사장에 표류한 모습으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이들은 전쟁을 나가던 배, 이들의 증언에 따르자면 거북 모양을 하고 왜적에 맞섰다니 임진년 전쟁 당시의 거북선인 듯한 배에 타고 있었던 듯하다. 무튼 이 배가 풍랑을 만나 침몰했고 수군인 이들이 물살에 떠밀려 이 섬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그로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는 <라이프 오브 파이> 속 파이의 이야기와 얼마 다르지 않다. 처음엔 표류로 쌓인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하고, 나중엔 신비한 경험과 마주하며, 마침내는 섬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다. 다만 다른 점도 있다. 그리고 그 다름이 이 영화 <바얌섬>을 <라이프 오브 파이>와는 다른 독자적 작품으로, 심지어는 장르와 성격을 달리 하는 창작물로 여기게끔 한다.
한국적 이색 사극, 충청 느낌 살아있네
▲바얌섬스틸컷
필름다빈
주인공은 모두 세 명이다. 영화엔 여기에 더하여 몇몇 인물이 더 등장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이 섬을 빠져나간다고 보기는 어렵고 이 섬은 무인도인 것이 확실시되므로 산 자는 셋 뿐이라 보는 편이 합당하다. 그러나 다른 이들 또한 등장인물이라 할 밖에 없는 것은 이 섬이 인간의 상식과 이해로는 좀체 닿지 않는 신비스러운 공간인 탓이다.
표류한 세 사람은 서로의 이름과 사정을 털어놓고 교류한다. 옛 충청도 말씨로 오가는 촌스러운 대화가 처음에는 낯설지만 이내 토속적 맛을 되살리고, 마침내는 영화의 주된 멋을 이룬다. 몽휘는 옥에 갇힐 사정을 면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노군이 되었다. 창룡은 왜적을 처단하겠단 일념으로 입대하여 포병이 됐다. 꺽쇠는 그저 사는 대로 살아온 끝에 오늘에 이른 순박한 청년이다.
물도 먹을 것도 부족하지 않은 이 섬을 대하는 마음 또한 제각각이다. 창룡은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 생각하지만, 몽휘는 거센 해류가 감싸고 있는 섬을 빠져나가는 일을 포기한다. 어차피 나가봐야 좋을 것도 없는 것이다. 꺽쇠는 늘 그렇듯 생각이 없다.
이승인가 저승인가, 거듭되는 환상적 경험
▲바얌섬스틸컷필름다빈
서로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사람이 세 명이면 나름대로 사회를 이루는 것, 서로에 대해 묻고 알아가며 세 사람은 동질감 있는 한 무리를 이룬다. 나무를 잘라 엮어 가짓배를 만들고, 먹을 것이나 마실 물을 찾고, 섬을 탐색하며 필요한 일을 해결해나가는 이들이다. 영화는 이들의 일상을 뒤따르며 조금씩 섬에서의 삶에 일어나는 균열을 포착한다.
시작은 다분히 한국적인 무엇이다. 모닥불에 앉아 발톱을 자르던 꺽쇠에게 몽휘가 자른 발톱은 모래밭이 아니라 모닥불에 넣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을 그 오래된 전래동화, 발톱을 먹고 제 흉내를 내는 쥐에 대한 이야기다. 놀랍게도 꺽쇠는 그로부터 둘이 되었다가 셋이 되고, 섬에서의 이야기도 제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바얌섬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이 괴이하기 짝이 없다. 뼈만 남은 여인의 시신과 그 곁에서 발견된 머리 붙은 아이의 두개골은 무엇을 말함인가. 나타난 꺽쇠의 분신들과 그들의 행각, 또 발견된 술단지며 어디선지 불려온 기생들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벌어지는 일과 그 끝의 운명을 보고 있자면 어쩌면 바얌섬은 처음부터 탈출이 가능한 이 세계의 섬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특별하게 보는 이유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작품 가운데 <아침 그리고 저녁>이란 작품이 있다. 이 소설의 두 번째 장은 어느 날 아침 일어난 늙은 어부 요한네스의 한 나절을 그린다. 평소와 다름없이 잠에서 깬 요한네스가 집을 나서 친구 페테르를 만나고, 대화하고, 낚시를 하고, 그러다 오래 전 애정 담긴 편지를 건넸던 첫사랑 여자와 마주치고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요한네스의 앞에 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에르나가 나타나고, 도무지 이 세계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빚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실과 현실 너머의 세계를 겹쳐 보이는 가운데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때로 어떤 세계는 우리의 이해로 닿지 않는다. 그건 낯선 공간, 표류하다 마주한 섬일 수도 있고 완전히 문화가 다른 먼 외국일 수도 있다. 그 환상적 공간 위에서 대화와 행동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의식이 작품을 특별하게 여기도록 한다. <아침 그리고 저녁>이 그렇고, <바얌섬> 또한 그러하다. 두 작품은 서로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이지만 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 바다 속에 바다가 있다는 이야기, 빠져 죽은 이가 한없이 가라앉고 있으리란 이야기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소설 가운데 또 다른 방식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존재다. <라이프 오브 파이> 속 섬과 표류하는 이야기가 하나같이 그러하고, <아침 그리고 저녁>의 요한네스가 어느날 마주한 마을에서의 이야기 또한 그렇다. <바얌섬>을 나는 이들 작품에 댈 수 있는 한국적 응답이라 여긴다. 새로우나 또 어떤 각도에서 보면 새롭지도 않은 것이, 우리 모두가 꿈과 환상, 현실과 공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앎과 모름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고 있는 때문이겠다. 나는 그 또한 영화가 뛰노는 장이라고 여긴다. <바얌섬>이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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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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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세 남자가 표류한 이 섬의 놀라운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