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03.
윤가은 감독이 이 작품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거리감을 형성하는 데 있다. 기본적으로는 극 내부 인물 사이의 거리 조절이 여기에 해당한다. 주인은 타인과 함께이고 싶어 하지만,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뒷걸음치는 인물이다. 미도(고민시 분) 역시 자신이 모르는 타인과의 접점을 최소화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두 사람만이 아니다. 주인이 세계로부터 소외된 이후 거리를 두고자 하는 친구들 역시 상황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 안에 존재한다. 자신의 세계를 방어하기 위함이다. 이 지점은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긍정적인 형식의 관계성이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또 하나의 거리 조절이 있다. 그런 인물들을 바라보는 창작자 본인의 거리다. 윤가은 감독은 이들에 대한 이해나 위로를 쉽게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 장면이 인물을 단면적으로 해석하거나 침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 대신 그 순간의 감정을 조용히 응시하며 비언어의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내는 감정적 서사를 보여주려 한다. 지속되는 침묵과 순간적인 표정, 멈칫하게 되는 장면의 누적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 시간을 함께 경험하고 견디도록 유도한다. 숨겨진 의미가 아직 무엇인지 정확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존재하는 상황과 행동의 복선 역시 여기에 속한다.
04.
"많이 노력하는데 아직 용서가 잘 안돼. 내 자신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모든 영화적 장치가 필요한 이유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남겨지는 어떤 신호들 때문이다. '아직 제시되지는 않았으나 감지되는 어떤 존재 또는 상황'. 영화는 단 한 번도 과거에 존재했을 사건에 대해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전사하지 않는다. 대신 발화되지 않은 불안이 장면 곳곳에서 맴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서로 다른 장면을 통해 불안 위에 구축된 안정과 평화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보이는 과정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하던 세계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잠깐의 신체적 접촉, 우정이었던 친구들의 달라진 시선, 그리고 익명성에 기댄 쪽지 몇 장만으로도 금세 모습을 뒤바꾸고 만다.
그렇게 눌러왔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불안의 감정이 유일하게 터져 나오는 장면이 바로 세차장 신이다. 영화는 이 장면에 이르러서야 겨우 주인이 감정의 밀도를 폭발시킬 수 있도록 만든다. 앞서 학교에서는 서명 거부로 의심받고, 고립되며 익명의 쪽지로 조롱받으며 침묵을 강요받아 왔던 감정이다. 세차장이라는 공간은 일상적이면서도 외부적인 공간에 속하며, 세척과 청소가 이루어지는 장소다. 하지만 작업 과정에서의 기기적 움직임으로, 시야적으로는 외부와 차단된다. 이 장면에서의 감정은 사실 신체적 반응에 가깝다. 누군가를 향한 분노나 원망이라기보다 감추고 견디고 있던 감정이 한계에 도달해 터져 나오는 과정을 우리가 마주하게 된다.
이번에도 감독은 어떤 개입 없이 일정한 거리에서 인물의 감정이 터지는 순간을 온전히 보여주고자 한다. (쇼트 편집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영화 전체의 태도나 거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지만, 다른 모든 신에서 인물이 감정을 제한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장면에 대한 어떤 책임감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신파와 같은 훨씬 더 쉬운 영화적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느 한 장면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화 전반에 이런 기운을 형성하기 위해서 감독은 신호를 남기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신호를 해석한 이들에게 상상보다 훨씬 더 크고 날카로운 메시지를 전달한다. 더 나아가, 지금 자신에게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했던 수많은 여성에게, 이 영화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분명한 손짓을 보내고 있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바른손이앤에이
05.
한편, 영화 <세계의 주인> 속에는 어린아이가 두 명 존재한다. 주인의 동생 해인(이재희 분)과 수호의 동생이자, 주인의 엄마인 태선(장혜진 분)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누리(박지윤 분)다. 두 존재는 분명 어리지만, 주인의 세계를 공유하고 나눠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먼저 해인은 종종 무심하게 비칠 수 있지만, 동시에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눈빛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 편지를 숨기고 답장을 몰래 쓰는 행동이 증거가 되지만, 말없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가족으로서 주인이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공간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사건의 동력이나 감정적 변화의 원인이 되지는 못하지만, 주인이 자신의 감정을 방어하고 회복하는데 무언으로 기여하는, 가장 낮은 톤의 공명이 되는 셈이다.
누리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영화 전체를 가로지르는 정서의 파장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다. 말을 아끼고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는 어린 시절의 주인을 떠올리게 하며 동시에 주인이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주인은 누리로부터 어떤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듯 보인다. 보호받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대리일 수도, 자신이 직접 지켜내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결코 순수하지만은 않다. 어느 순간 누리의 몸을 세게 누르는 비틀린 방식으로 표현되는 행위적 감정은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아픈 장면이 된다.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할 수 없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이의 서툰 고백이다. 물론 폭력과 같은 서사적 사건화를 위해 제시된 인물은 아니다. 누리는 분명 주인이 타인에게 감정을 투사하는 실패의 대상이 되지만, 다시 관계를 재설정하고 감각할 수 있게 되는 새롭고도 희미한 통로가 된다.
06.
"나도 너처럼 진짜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너를 영원히 기억할 거야. 고마워."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은 정답이 넘치는 시대에 아주 작은 망설임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올린다. 서명 거부라는 단순한 사건보다 그 이후, 주인을 휘감는 감각의 파문들, 말로 설명되지 않는 불안과 자신조차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의 떨림을 영화의 중심으로 옮긴다. 주인이 끝내 해답을 도출한다거나 적극적인 성장 서사를 택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흔히 말하는 성장 서사라기보다 침묵을 견디는 자의 윤리에 관한 영화에 가깝게도 느껴진다. 스스로의 감정을 끝내 해명하지 못하더라도, 그 감정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 이 작고 불완전한 고집이야말로, 감독이 말하는 '주체'의 첫 형상이다.
영화가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다. 자신의 세계를 지금 의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감지한 불편함을 스스로 지워내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그 감각의 조각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사적인 물음. 물론 어떤 물음에도 감독의 대답과 정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그 망설임의 시간을 짧게나마 주인과 함께 경험하고 살아보게 함으로써, 말하지 못한 감정도, 설명할 수 없는 불안도 모두 분명한 현실일 수 있다는 믿음을 제시한다. 그렇게 아주 조용히, 스스로의 감각이 부정당하지 않는 세계에 실제로 발 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한다.
영화는 끝내 닿을 수 없는 관계와 여전히 미완의 감정들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미완성은 실패가 아닌, 이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감각의 회복에 가깝다. 감정을 내면에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밀어 올리는, 가장 조심스럽고도 찬란한 첫 몸짓이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제 우리는 안다. 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완벽한 이해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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