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극장가 강타한 일본 애니메이션, 결코 우연이 아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1200]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 박스오피스를 연거푸 타격하고 있다. 일일 박스오피스 최상단에 위치한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과, 5위에 올라 있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그 주인공이다. 하루 각 7만 명과 1만 명 넘는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이들 작품은 누적관객수가 벌써 250만 명과 550만 명을 훌쩍 넘겨 자타공인 한국 극장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2025년 전체 박스오피스를 통틀어보아도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전체 2위로, 올해 최고 인기작인 <좀비딸>을 추월할 기세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또한 8위로, 흥행세가 잦아들지 않고 있어 더 높은 위치에 오를 것이 확실시된다. 이들 작품에 더하여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과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까지가 올해 흥행순위 30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올 한 해 일본 애니메이션의 기세가 남다르단 걸 확인케 한다.

한국 시장 강타한 일본 애니, 결코 우연 아냐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스틸컷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스틸컷소니 픽처스

그로부터 <귀멸의 칼날> 뿐 아니라, <진격의 거인>과 <체인소 맨>에 이르기까지, TV판 애니와 극장판 애니로 만들어진 작품을 여럿 찾아보았다. 수백 편의 영화글을 써내는 동안 거의 돌아보지 않았던 일본 애니가 어떠한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오타쿠 문화라고 조롱까지 받았던 애니 팬은 꾸준히 증가했고, 안방을 벗어나 한국 영화산업의 중심에서 기록할 만한 성취를 이루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영화를 다루는 이들이 일본 애니를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씨네만세 657회차로 소개하기도 한 <대결! 애니메이션>과 같은 작품은 일본 애니를 지탱하는 산업 전반의 저력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작화부터 성우, 특수효과, 동작 담당자, 편집자, 마케팅 담당자, 프로듀서, 총감독에 이르기까지, 또 소설이며 만화로부터 TV판 애니와 극장판 애니, 실사영화며 게임, 각종 상품으로 이어지는 미디어믹스 생태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작품이 다룬 일본 TV 애니 생태계는 극영화가 깊은 침체를 겪은 지난 20여 년 동안에도 일본 콘텐츠산업이 버텨낼 수 있었던 계기로써 작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기울어가는 기색이 역력한 한국 극장가를 일본 애니가 폭격하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은 후지모토 타츠키의 만화 기반 시리즈 <체인소 맨>의 첫 극장판 영화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2022년 작 TV판 애니와 삽화가 딸린 히시카와 사카쿠의 경소설 <체인소 맨 버디 스토리즈>, 심지어 2023년 일본 현지에서 공연된 뮤지컬로까지 만들어진 작품인 만큼 극장판 영화 제작은 예고된 수순이라 하겠다. 총감독은 TV판 작품을 극장판으로 재편집한 총집편을 앞서 연출했던 요시하라 타츠야가 맡았다.

TV판 이어 극장판까지, '체인소 맨' 매력이 뭐길래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스틸컷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스틸컷소니 픽처스

줄거리는 원작을 기준으로, 앞선 TV판 애니의 바로 다음 이야기가 되겠다. TV판 애니가 악마들이 날뛰는 세계 속 주인공인 덴지가 일본 공안 소속 데블헌터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영화는 그를 위협하는 흑막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내몰렸던 덴지다. 부모가 남긴 빚을 이어받았고, 사채업자에게 간신히 이자만 내는 삶을 견디며 오늘에 이르렀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데블헌터를 직업으로 삼았고, 생활고 속에서 두 개 있는 모든 장기를 떼어 팔기까지 했다. 눈과 신장, 심지어 고환까지 한쪽을 떼어낸 덴지의 삶이란 이 시대의 막장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를 바꿔낸 것이 말이 통하는 악마 포치타였다. 전기톱 악마견 포치타와의 계약을 통해 수틀리면 전기톱 악마로 변할 수 있게 된 덴지는 그 재능을 인정받아 공안 대마 특이4에 발탁돼 안정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가난할 땐 기본적 욕구조차 제쳐둬야 했던 덴지다. 그러나 밑바닥 데블헌터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공안 대마4과 소속 공무원이 되고 나니 그 삶은 전과는 전혀 달라지게 됐다. 마침 계기가 된 건 레제라 불리는 어여쁜 소녀다. 어느 날 그 앞에 나타난 레제는 덴지에게 끝없는 호감을 보낸다. 사내라면 좋아할 밖에 없는 모습으로 가득한 예쁘고 귀여운 그녀에게 덴지는 무방비로 빠져든다.

도파민 터지는 말초적 자극, 그뿐일까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스틸컷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스틸컷소니 픽처스

영화는 덴지와 레제의 만남, 그로부터 시작된 위기와 결말까지를 속도감 있게 다룬다. 만화 단행본으로도 1권을 넘기는 이야기를 한 편 애니 속에 녹여내려다 보니 캐릭터의 전사를 충실히 다룰 수 없는 건 어찌할 수 없다. 만화 원작, 적어도 TV판 애니를 본 이들에게 적합할 속도와 설명으로 덴지와 레제의 이야기를 전한다.

스포일러를 방지하고자 전개와 결말을 적을 수는 없겠다. 다만 극중 등장하는 한 마디 대사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영화 속 덴지가 "내가 아는 여자들은 모두 날 죽이려고만 해. 내 심장만을 원하지. 정말 내 심장은 상관하지 않으면서"하고 외치는 순간이 있다. 포치타와 결합해 전기톱으로 변할 수 있는 비기가 깃든 덴지의 특별한 심장을 많은 이들이 노리기 때문이다.

<체인소 맨>에 어떤 주제의식이 담겨 있는지에 대하여 확언하긴 어렵다. 만화원작과 TV판, 극장판 애니, 또 소설을 같은 줄거리를 공유하는 독자적 작품으로 이해하자면 더욱 그렇다. 흔한 이세계물로 그 세계관에서 이렇다 할 상징이며 철학적 깊이가 부재하다고 말하는 것 또한 틀렸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판타지적 설정 가운데 자극을 극대화한 구성과 연출이 이 작품의 특징인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현실세계의 반영, 또 주제의식이라 부를 만한 요소가 완전히 부재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TV판 애니에선 경제적 궁핍 속에서 기본적 권리와 욕구마저 빼앗긴 청춘의 현실이 강조되고 있고, 그중에서도 연애하지 못하는 사내의 처지와 심리 또한 부각되고 있는 게 사실인 때문이다. 현실적 결핍 속에서도 이상적 관계를 좇는 덴지의 이야기는 레제와의 만남에서 또한 부각되기에 이르는데, 이야기의 상당부분이 남녀의 만남으로 채워지기 때문이겠다.

남성향 애니에서 엿보이는 결핍과 욕구

이성을 만나지 못한다는, 현실에 치여 연애할 수 없다는 결핍은 덴지의 주된 성격을 이루는 요소다. 동시에 사랑받고 이해받고 싶다는 욕구, 또 성적 해소에 대한 욕망 또한 작품 가운데 연거푸 강조된다. 이는 그대로 작품과 주인공에 대한 독자의 몰입, 나아가 공감을 이끄는 요소로 작용한다. 매순간 좀처럼 가 닿지 못하는 진심, 외연적 조건만으로 평가되고 욕망되는 상황이 덴지에겐 결핍이 된다. 그렇다고 연애를, 이성과의 관계를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가.

<체인소 맨>은 확연히 남성향 애니다. 그중에서도 십대와 이십대 청춘들이 주 독자로 분류되는 다크히어로 소년만화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또한 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또래의 욕구와 결핍, 이상과 취향이 그대로 녹아든 이야기와 전개를 가지고 있다. 단순하고 시시하다 말할 수도 있겠다. 어디서 많이 본 줄거리에 깊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극적인 애들 만화쯤으로 치부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 영화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청춘의 면모는 이 시대 앳된 남성들의 현실적 결핍이며 욕구, 두려움 따위와 제법 닮아 있다. 아마도 그것이 <체인소 맨>이 다른 작품들에 앞서 젊은 남성들에게 선택받는 이유 중 하나일 테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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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