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상사'가 IMF를 다루는 독특한 방식, 통했다

[드라마 리뷰] tvN <태풍상사>

최근 몇 년간 한국 드라마에서 레트로는 하나의 공식이 되었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트렌드의 부흥을 이끌었다면 tvN <태풍상사>는 시대적 배경을 위기로 다루면서 다른 전략을 택한다. 드라마에서 1998년은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도구다. IMF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태풍상사가 살아남는 방식은 현대적인 관점에 가깝다.

영상 홍보로 위기를 벗어나고 만화처럼 보이는 과장된 방법론을 택하는 해법들이 1998년에 펼쳐진다. <태풍상사>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관객이 IMF라는 시대적 위기를 알고 현대의 트렌드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등장인물들은 그것을 모르는 비대칭적 구조가 서사적 쾌감을 발생시킨다. 드라마는 미래를 아는 관객을 공모자로 만든다.

냉정과 열정으로 회사의 위기 극복하기

 드라마 <태풍상사> 스틸컷.
드라마 <태풍상사> 스틸컷.tvN

드라마 속 강태풍(이준호)과 오미선(김민하)은 전형적인 대립 구도를 따른다. 강태풍은 직관적이고 열정적이며, 때로는 무모하게 사업을 진행한다. 반면 오미선은 강태풍보다 '상사맨'으로서의 역할에 걸맞은 인물이다. 회사를 우선으로 삼는 그는 이성적인 판단력을 앞세운다. 계산기처럼 암산하고 빠르게 비즈니스 영어를 암기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드라마는 두 사람의 대립을 로맨틱 코미디의 관습적인 플롯에서 멈추는 걸 방지한다.

냉정과 열정을 상징하는 두 캐릭터의 충돌은 '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철학적 질문이다. 부산 공장에서 개발된 '슈박' 에피소드는 이러한 질문을 명확히 드러낸다. 안전화 제조업체 슈박의 사장은 건달 사채업자들에게 쫓기고 강태풍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두 눈을 담보하는 무모한 각서를 작성한다. 회사의 리스크를 개인의 영웅주의 심리로 떠안는 비이성적 결정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오미선은 격하게 반발한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충돌하는 지점은 단순히 업무 방식의 차이가 아니다. 태풍은 상사맨이기 이전에 눈 앞에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인물이고, 미선은 한 회사의 대표로서 계약을 맺어야지 개인의 공명심으로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타박한다.

드라마는 어느 한쪽을 옳다고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두 관점은 항상 충돌하면서 서로를 보완해 가면서 태풍상사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다. 태풍의 열정이 만든 기상천외한 방법이 이 기회를 만들고, 미선의 냉정함은 그것을 실현 가능한 전략으로 바꾼다.

IMF의 위기를 아는 시청자와의 공모

<태풍상사>가 IMF를 다루는 방식은 독특하다.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 현대사의 집단 트라우마지만, 이 드라마는 그것을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치부하며 넘기는 게 아니라 그 위기를 드라마 전반에 '위험함'이라는 분위기를 깔아두는 쪽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태풍상사가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시청자들의 시선과 일치한다. 시청자들은 이미 2000년대 이후 영상 마케팅이 대세가 될 것임을 알고, IMF로 말미암은 주요 사건들과 병폐들을 알고 있다. 드라마는 이 선지식을 서사의 동력으로 활용한다.

6화에서 슈박을 살리기 위해 태풍상사가 제작하는 홍보 영상은 1998년 기준으로는 파격적으로 보이겠지만 2025년을 살고 있는 시청자에게는 익숙한 전략이다. 이러한 아나크로니즘은 의도적이다. 시청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극에 참여한다. 인물이 제시한 해결책에 공감하며 탁월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드라마는 이러한 선택을 만화적 과장으로 표현한다.

홍보 영상은 당시 특정 광고들을 패러디하는 방식으로 과장하여 연출하고, 건달을 위시하는 당시 사채업자들의 험난한 분위기를 검열하지 않고 표현한다. 여기서 강태풍이 제시하는 돌파구는 리얼리즘의 범주를 벗어난다. 하지만 이것이 드라마의 흥행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태풍상사>는 1998년을 무대로 문제 해결의 쾌감을 빚어내는 드라마다.

미래의 관점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이 방식은 일종의 판타지에 가깝다. "만약 그때 우리가 이걸 알았다면"이라는 가정법적 유희. 관객은 등장인물보다 많이 알지만, 동시에 그들이 해내기를 응원한다. 이 이중적 시선이 드라마의 독특한 매력을 만든다.

여성의 역할을 재배치하기

 드라마 <태풍상사> 스틸컷
드라마 <태풍상사> 스틸컷tvN

강태풍은 아이디어를 내고 오미선은 아이디어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틀어 막는다. 이러한 역할 분담은 얼핏 전형적인 젠더 서사처럼 보인다. 남성이 비전을 제시하고 여성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그림처럼. 하지만 <태풍상사>는 이 구도를 교묘하게 뒤집는다. 실제로 태풍상사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오미선이다. 태풍의 직관은 회사의 방향성을 제시하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게끔 행동하는 건 미선의 몫이다. 자신의 돈을 일부 끌어다가 미수금을 해결하고, 해외 기업을 상대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중요한 행동을 모두 미선이 수행한다.

19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긴 했지만, 당시에는 여전히 중요한 의사결정권을 가질 위치까지 진출하기는 어려웠다. 드라마는 이 현실을 재현하면서도 서사적으로 극복한다. 회사의 경리로 입사했던 오미선은 IMF로 부도 직전까지 몰린 회사에 끝까지 남으면서 의리를 지켰고, 이제는 회사의 주임으로서 승진하며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오미선이라는 인물 없이는 강태풍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단순히 '능력 있는 여성 캐릭터'를 제시하는 것 이상이다. 드라마는 아이디어와 실행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 자체를 해체한다.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태풍과 미선은 서로 없이 완성될 수 없다.

우상향중인 드라마,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드라마 <태풍상사> 스틸.
드라마 <태풍상사> 스틸.tvN

<태풍상사>는 현재 6화 기준 시청률 8.9%를 기록하며 완곡한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는 중이다. 이 드라마는 자신이 약속한 것을 충실히 지킨다. 레트로 미학과 장르적 재미의 균형, 두 주인공의 케미스트리, 무엇보다 시청자를 공모자로 만드는 서사 전략이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IMF는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실업, 가정 파탄, 자살이 일상이었던 시대를 계속해서 장르적 쾌감의 배경으로만 다룰 지도 궁금하다. 지금까지 드라마는 태풍상사라는 작은 회사의 생존에 집중했지만, 서사가 확장되면 더 큰 사회적 맥락을 외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때 이 드라마가 어떤 선택을 할까. 계속해서 미래의 해법을 차용할 것인지, 아니면 1998년의 무게를 심도 있게 마주할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움직임만으로 <태풍상사>는 관심 있게 지켜 볼 이야기다. 드라마는 레트로를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도구로 활용한다. 과거를 향수하면서도 과거와 현재 사이의 간극을 장르적 에너지로 전환한다. 태풍상사가 앞으로 만들어갈 1998년이 실제 역사와 어떤 긴장을 형성할지, 그리고 두 주인공이 각자의 방식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계속 지켜볼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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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직 노동자 겸 플랫폼 노동자. 음악-영화-책 감상이 유일한 취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