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걸' 스틸사진.
메가박스중앙㈜, ㈜올랄라스토리혜
니콜 키드먼은 수십 년 숨겨온 은밀한 욕망을 청년 인턴과 풀어가는 로미 역을 맡아 "커리어 최고이자 기적적인 연기"라는 극찬을 받으며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볼피컵)을 받았다. "블라우스 단추를 끝까지 채운 배우"라는 수식어가 익숙한 그녀가 전라를 불사하며 연기 경력 사상 가장 대담한 변신을 선보였다. 그녀는 시나리오를 읽고 "이건 꼭 해야 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성 감독과 작업하며 여성의 성에 관한 모든 주제를 논의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논의가 영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상대역인 해리스 디킨슨은 여주인공보다 29살 어린 나이 차이를 오히려 성적 감성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영리하게 활용했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그는 사무엘의 변덕스럽고 자신감 넘치는 남성성과 부드러운 소년 같은 공감 능력이라는 이중성을 유연하게 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 배우 간의 성적 연기는 아예 배경 음악을 지워버리고 자연스러운 육체의 교감 소리를 들려주는 가운데 진행되며 확실히 에로틱하다.
로미의 남편 제이콥 역의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색다른 이미지 연출 또한 흥미롭다. 주로 정열적이고 남성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던 그는 이 영화에서 아내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이자 배우자의 배신으로 고통받는 가장의 복잡한 내면을 깊이 있게 표현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런 배역이 어색하지 않게 보이는데, 그런 변화가 배우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전복적 미러링의 성취
할리나 레인 감독은 이 영화가 '원초적 본능', '나인 하프 위크'와 같은 남성 중심 에로틱 스릴러의 계보를 이어받되, "완전히 여성의 시선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하며 장르적 차별화를 꾀했다고 한다. 그녀는 로미의 성적 판타지에 대해 "변태적 취향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여성이 원하는 것을 얻는 모습에서 모순된 형태이긴 해도 정당화와 위안을 찾았다.
사실 영화에서 변태적 취향이라고 할 만한 내용은 별로 없다. 게다가 영화는 감독의 의도보다 더 나갔다. 남성 중심 서사의 '미러링'을 통해 여성의 시선을 확보하는 것이 애초 감독의 의도였다면, 영화 자체는 그 이상의 전복적 성취를 보여준다. 로미는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CEO로 사회적 권력의 우위를 점하지만, 섹슈얼리티의 영역에서 청년 인턴 사무엘에게 성 권력을 자발적으로 넘겨주며 복종을 통해 쾌락을 얻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회적 권력과 성 권력의 역전이 대칭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로미의 사회적 지위와 성적 욕망 사이의 복잡한 충돌, 그리고 사무엘이 그 취약점을 파고드는 영리한 과정을 통해 남녀의 성 권력의 다층적이고 유동적인 속성을 드러낸다. 에로틱 스릴러가 성 권력을 제로섬으로 묘사해 남성의 욕망을 중심으로 여성을 통제하거나 여성이 표면상 통제하더라도 실질적인 성 권력의 이전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과 달리, 현대 사회의 성 권력 관계와 여성의 주체적인 욕망을 훨씬 복잡하고 깊이 있게 탐구한다. 성 권력 관계의 본질은 성이며 종국엔 관계로 외화한다는 속성을 영화로 잘 잡아냈다.
성적 성숙을 이룬 성장 영화
▲'베이비걸' 스틸사진.메가박스중앙㈜, ㈜올랄라스토리
대부분의 진지한 에로틱 스릴러는 주인공의 금기된 욕망이 사회적 파멸이나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금기를 깬 개인에 대한 사회적 심판이자, 현실의 도덕적 질서를 재확인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그러나 '베이비걸'은 이 장르의 클리셰를 깨고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이 이례적인 결말은 바로 감독의 여성주의적 시선, 즉 '여성의 주체적인 욕망 추구'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영화는 로미가 사회적 성공, 결혼 생활의 만족, 그리고 성적 주체성 회복이라는 세 가지 영역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깨닫고 이를 향해 나아갈 힘을 얻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결말은 로미가 사회적 성취와는 별개로 자신의 내면에 갇혀 있던 성적 욕망을 인정하고 해소하는 과정을 거치며 성적 성숙을 이뤄낸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성장 영화로 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특히, 이 성 해방 서사의 완결은 금기된 연인과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는 로미가 외도를 끝내고 일상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딸 이사벨(에스더 맥그리거)과 소통을 핵심적인 장치로 활용한다. 딸과 관계 회복은 로미가 성적 주체성 확인이라는 개인적인 성장을 넘어, 다음 세대와 공감과 연대를 통해 사회적 삶의 책임감을 재확인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여성주의 관점에 해당한다. 딸의 인도로 일상에 복귀하는 모습은 어머니가 자신의 욕망을 당당히 직시함으로써 얻은 진정한 자아를, 딸에게 물려줄 수 있는 긍정적인 여성상으로 완성하는 의미를 담는다.
비극적 결말 대신 해피엔딩을 선택함으로써, 영화는 로미의 욕망을 파멸의 원인이 아닌 자기 발견과 자기애를 완성하는 동력으로 인정하고 관객에게 전달한다. 즉 '베이비걸'의 해피엔딩은 금기된 욕망을 부정하거나 욕망추구를 처벌하는 대신, 그 욕망추구의 과정을 통해 여성이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축복하는 진보적인 성 해방 서사를 보여준 셈이다.
궁극적으로 영화는 "온전한 자신을 부끄럼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자기애와 주체성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금지된 관계가 초래하는 열정과 해방감을 관객 모두가 느낄 수 있겠지만 여성 관객에게 효용이 더 클 법하다. "현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지적이고 우아한 성인영화. 진정으로 에로틱하고 스타일리시하다"(Little White Lies)는 평가에 동의한다. 29일 개봉.
안치용 영화평론가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문학, 영화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세계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나이 들어 신학을 공부했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