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스틸컷
워너브러더스코리아
태권도 품새에 가라데 도장, 이유 있는 설정
근래 보기 드문 162분짜리 장편영화, 그것도 전체 신을 1.50:1 비율의 비스타비전 필름 카메라로 촬영해 그나마 비슷한 1.43:1 규격의 아이맥스(IMAX) GT 규격으로 찍어낸 대작이다. 형식과 내용 모두가 장대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역작은 세대를 건너 원치 않은 세상, 또 운명과 대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부각한다. 대단한 뜻이 아닌 그저 사랑으로부터 혁명과 범죄 사이 모호한 삶을 살게 되는 밥의 모습이, 그가 사랑한 퍼피디아의 초라한 현실이, 또 일생을 혁명에 갈아 넣은 이들의 오늘이 하나하나 그러하다. 가라데를 표방하지만 품새부터 도장에 써붙인 한글까지가 태권도처럼 보이는 동방의 무예를 멕시칸 사부가 미국에서 가르친다. 그가 헤쳐온 현실이라고 어디 마음 같기만 했을까.
고작 백인 우월주의 클럽에 가입하기 위하여 제 친딸마저 살해해 없애려는 록조의 모습은 한때나마 문화의 용광로를 표방하며 인종과 성별을 초월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는 국가라 광고하던 미국의 초라한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흑인 여성에게 본능적 끌림을 느끼지만 그를 억눌러야 하고, 차마 직접 어찌하지 못하면서도 제 딸을 죽이겠다 나서는 록조다. 자기를 부정하고까지 다다르려는 현실은, 그러나 그를 반기지 않는다.
록조의 모습으로부터 수많은 부정과 제국주의적 침탈 가운데서도 민주주의며 다원주의의 원칙만큼은 적어도 숭상하는 척했던 미국의 지난 시간과 오늘을 겹쳐 보게 되는 건 의도된 결과다. 어째서 그렇게 몸에 딱 붙는 옷을 입느냐고, 심지어 키 높이 깔창까지 넣지 않았냐고 말하는 윌라에게 잔뜩 긁혀 분개하던 록조는 그 자긍심이며 자존감을 지키기 어려운 미국의 오늘을 대변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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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면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던 미국이 무력을 등에 업고 제 욕구를 탐한 역사가 길다. 저기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일으킨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존재하지도 않았던 대량살상무기를 이유로 일으킨 이라크전, 또 한반도 비극의 계기이기도 한 정판사 조작사건 등이 모두 그와 같지는 않았나. 록조가 훈장을 받는 모습이 차라리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건 퍼피디아에 대한 매혹과 그 애인에 대한 분노가 수면 아래 깔린 진실임을 관객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록조에게 오늘의 미국을 투영했다 보아도 무리한 해석이라 할 수는 없을 테다.
그런 록조가 끝끝내 마주하는 결말은 폴 토마스 앤더슨이 오늘의 미국에 선사하는 경고라 해도 좋겠다. 비록 영화가 철지난 유대 인종주의적 풍자를 식상하게 배치하고 혁명에 대해서도 겉만 비추고 있을 뿐이지만, 록조를 통해 보여주는 미국의 몰락만큼은 날카롭고 거침없다. 그 록조가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결정적 계기가 그가 급습한 프랜차이즈 업체 소유주가 이 클럽의 회원이기 때문이란 것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결국 그 이념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인종주의적이고 특권적인 결합마저도 자본과 카르텔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맞은편엔 그가 탄압하는 대상인 사부 세르히오가 있다. 한국과 일본, 멕시코, 미국이란 여러 문화를 용광로적으로 녹여낸 표상이자 그 스스로 다른 이를 환대하고 희생하는 열린 자세의 상징인 세르히오다. 대책 없이 저를 찾은 밥을 끝끝내 보호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감당하는 멋진 이다. 그의 모습을 폴 토마스 앤더슨은 미국의 희망이자 멋이며 자랑으로 제시한다. 지난 시대의 혁명가가 철없는 충동과 가족주의적 애정으로 움직이고, 또 오늘의 젊은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패기만을 갖췄다 해도 세르히오와 같은 어른의 아량과 용기만 있다면, 그렇다면 희망이 있지 않겠냐고 말하는 듯하다. 멋지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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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