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에게나 마음 한구석에 남은 발라드 한 곡이 있습니다. 어김없이 찾아온 가을, 그 노래가 당신의 추억에 가 닿길 바랍니다.[기자말] |
식사라는 것이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것이 아니라 친목 도모의 목적도 있기 때문에 혼자 끼니를 해결하는 '혼밥'은 때론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혼밥은 오롯이 혼자서 음식을 즐길 수 있다는 확실한 장점도 있고 최근엔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혼밥 문화가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실제로 요즘엔 혼밥 손님을 위한 1인석이 마련돼 있거나 1인 메뉴를 판매하는 식당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나 역시 예전에 비해 혼밥을 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는데 요즘엔 혼밥을 하는 시간이 전혀 외롭지 않다. 혼밥러들을 위한 밥 친구 '유튜브'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평소에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이나 '매불쇼', '사장 남천동'같은 정치 유튜브를 즐겨 보지만 밥을 먹을 때는 먹방 유튜브를 시청할 때가 많다(내 최애 먹방 유튜브는 단연 쯔양이지만 쯔양의 영상은 주로 밤에 올라오기 때문에 식사 시간과 겹치지 않는다).
평소 혼밥을 할 때는 큰 고민 없이 알고리즘에 올라온 먹방 영상 중 하나를 선택하지만 가끔 먹방과 수다를 함께 보고 싶을 때 찾아보는 채널이 있다. 바로 가수이자 215만 유튜버 성시경의 먹방 컨텐츠 '먹을텐데'다. 최근엔 밥 먹으면서 편하게 보는 먹방 유튜버 이미지가 생겼지만 사실 성시경은 나에게 꽤나 애틋한 의미로 남아있는 가수다. 성시경은 오래 전에 헤어진 전 여자친구가 가장 좋아했던 가수였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싫어할 조건' 두루 갖춘 가수
▲데뷔 초 성시경은 남자, 특히 군인들이 좋아할 수 없는 조건을 너무 많이 갖추고 있었다.
MBC 화면 캡처
성시경이 지난 2000년 인터넷 오디션 '뜨악 가요제'에서 '내게 오는 길'로 데뷔했을 때 나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복무를 하던 육군 일병이었다. 상당히 깔끔한 음색을 가진 신인이 등장했다고 생각했지만 폭발적인 고음을 쏟아내지도, 자신의 앨범을 직접 프로듀싱하는 싱어송라이터도 아니었던 성시경에게 큰 관심을 두진 않았다(무엇보다 2000년은 1세대 걸그룹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2001년 4월 정규 1집을 발표한 성시경은 '처음처럼'과 '내안의 그녀', 그리고 이 시대 최고의 댄스곡 '미소천사' 등을 히트 시키며 연말 시상식에서 장나라와 함께 신인왕을 휩쓸었다. 하지만 당시 성시경은 MBC <목표달성 토요일-애정만세>에 출연해 느끼한 매력(?)으로 여심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군인들 사이에서 민심은 대단히 좋지 못했다. 당연히 나에게도 성시경은 그냥 '노래만 좋은 가수'에 불과했다.
그렇게 무사히 군복무를 마친 나는 월드컵이 끝난 2002년 7월 성시경의 2집 발매 소식을 들었다. 처음엔 큰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윤종신과 김형석, 조규만, 강현민, 유희열, 심현보, 나원주 등 평소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소식을 듣고 앨범을 구매했다. 그리고 성시경은 2집에서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를 통해 음악 프로그램 1위를 차지했고 '넌 감동이었어'와 '좋을텐데'를 차례로 히트 시켰다.
나는 2집에 대한 높은 만족도에 2003년에도 성시경 3집을 구매했고 타이틀곡 '차마'와 후속곡 '외워두세요'를 매우 좋아했지만 앨범의 전체적인 만족도는 2집에 비해 썩 높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3집을 끝으로 더 이상 성시경의 앨범을 사지 않았고 평범한 대중들처럼 방송을 통해 4집의 '잘 지내나요'와 5집의 '거리에서' 같은 타이틀곡, 그리고 TOY 앨범의 객원가수로 참여해 부른 노래 정도만 들었다.
2000년대 중·후반 성시경은 가수로도 유명했지만 MBC 라디오의 <푸른밤, 그리고 성시경입니다>를 진행하는 DJ로도 유명했다. 성시경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심야 라디오에 상당히 잘 어울렸고 특히 "잘자요"라는 엔딩 멘트는 성시경을 상징하는 '시그니처 멘트'가 됐다. 당시 나는 다른 남자들처럼 성시경에 대한 호감이 거의 없었는데 2008년 성시경을 좋아하는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리 위한 노래 같았던 성시경의 세레나데
▲성시경을 썩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성시경을 좋아했던 여자친구를 위해 성시경 부산콘서트를 직접 예매했다.
양형석
2000년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던 싸이월드의 영화 동호회를 통해 알게 된 그녀는 처음부터 호감이 있었지만 서울과 부산이라는 지역적 한계 때문에 그냥 '아는 오빠'로만 몇 년을 지냈다. 그러던 2008년 1월, 여느 때처럼 나와 인터넷 메신저로 연락하던 그녀는 우울하다며 기분 전환을 위해 가까운(?) 거제도로 여행을 떠났고 나는 우울한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고속버스를 타고 거제도로 향했다.
거제도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더욱 가까워졌고 그렇게 나와 그녀의 '장거리 연애'가 시작됐다. 하지만 연애 초기 다른 연인들처럼 자주 만날 수 없었기에 나는 '그녀를 감동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항상 고민했고 평소 음악을 많이 듣지 않는 그녀가 유독 성시경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나는 3집 이후 크게 좋아해 본 적 없었던 '버터왕자' 성시경의 노래를 매일매일 들었다.
그렇게 공부하듯 성시경의 노래를 열심히 듣던 중, 사랑에 푹 빠진 내 마음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노래를 발견했다. 바로 성시경 4집의 15번 트랙에 수록된 '두 사람'이라는 발라드곡이었다. '두 사람'은 성시경 2집에서 '좋을텐데'를 만들었던 윤영준 작곡가가 만든 노래로 '좋을텐데'가 연인이 있는 사람을 향한 짝사랑의 감정을 담았다면 '두 사람'은 오롯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달달한 러브송이었다.
나는 평소 가요를 들을 때 멜로디보다 가사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편이다(영어 가사가 부쩍 늘어난 요즘의 K팝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두 사람'에서는 "여전히 서툴고 또 부족하지만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을게 캄캄한 밤 길을 잃고 헤매도 우리 두 사람 서로의 등불이 되어 주리"라는 가사에 꽂혔고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생각하면서 귀에 피가 나도록 '두 사람'을 열심히 들었다.
나는 그녀를 생각하며 열심히 연습한 '두 사람'을 노래방에서 들려주기도 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성시경의 입대 전 마지막 전국투어 부산 콘서트에 함께 가기도 했다. 그렇게 1년 넘게 연애가 이어지며 그녀와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게 된 2009년 4월 나는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나는 일상에 바쁜 그녀를 계속 귀찮게 했고 2009년 6월, 지친 그녀는 결국 나에게 이별의 말을 꺼냈다.
한동안 성시경이 부른 사랑 노래를 열심히 듣던 나는 그녀에게 이별의 말을 들은 후 성시경이 '슬픈 발라드 전문가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나의 휴대전화 속 플레이 리스트에는 '두 사람'을 비롯해 '내게 오는 길', '미소천사' 같은 달달한 사랑 노래들이 삭제되고 '내 안의 그녀', '넌 감동이었어', '차마', '잘 지내나요', '거리에서', '한번 더 이별' 같은 슬픈 이별 노래들이 채워졌다.
그녀가 생각나는 슬픈 노래가 돼 버린 '두 사람'
▲성시경은 지난 2013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해 솔로 남성 관객들 앞에서 '두 사람'을 불렀다.KBS 화면 캡처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한 2013년 12월,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오빠 한 번 믿어봐'라는 부제로 솔로 남자 관객들을 불러 진행한 공연을 시청했다. 당시 미스에이와 포미닛, 에이핑크 같은 인기 걸그룹들 사이에서 성시경이 남자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처음 부른 노래가 바로 '두 사람'이었다. 모두가 웃고 즐기는 유쾌한 분위기였지만 나는 그녀 생각에 마냥 웃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다시 몇 년이 더 흐른 어느 날, 그녀에게서 SNS 다이렉트 메시지로 나의 안부를 묻는 연락이 왔고 나는 설레는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정말 말 그대로 '안부 연락'이었고 오랜만에 찾은 그녀의 SNS에는 나보다 훨씬 듬직해 보이는 남자와 내가 끝내 입혀 주지 못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녀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마음 속으로 그녀를 떠나 보내며 '한번 더 이별'을 했다.
이제는 그녀와 헤어진 지도 달력을 보고 따로 계산을 해야 할 만큼 아주 긴 세월이 흘렀다. 우연히 SNS에서 그녀를 닮은 아이들의 사진을 볼 때도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그녀에 대한 애틋한 감정도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모두 돌고 돌아 제 자릴 찾고 사라졌던 별 다시 또 태어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꼭 한 번 그녀를 만나고 싶다. 그때는 꼭 혼자 있어 달라는 부질 없는 당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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