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녀는 종군기자로 자원한다. 영국 정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부했지만, 미국인 신분 덕분에 보그 소속 기자로 참전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사진은 '여성으로 본 전쟁'의 시선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생말로에서 최초의 네이팜탄 폭발을 포착했고, 독일군 협력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모욕당하는 장면을 기록했다. 그리고 부헨발트와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인류의 가장 어두운 장면을 렌즈에 담았다.
그녀의 사진은 충격적이었다. 피사체는 피와 먼지, 절망으로 뒤덮였지만 프레임은 냉정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사실을 남기려는 한 여성의 시선이 있었다.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는 그 순간들을 따라가며, 전장의 한가운데서 자신만의 시선을 세우려 했던 한 인간의 여정을 그린다.
리 밀러 이전에도 여성 종군기자는 존재했다. 19세기 이탈리아 독립전쟁을 취재한 마거릿 풀러다. 그녀는 또한 최초의 페미니스트로도 이름이 드높기에, 여성 종군기자의 역사는 곧 페미니즘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그녀들은 싸워야 했다. '여자가 그런 일을 왜 하느냐'는 질문과 싸우고,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는 취재 현장을 뚫어야 했다.
리 밀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선의 남성 기자들은 그녀를 '보그의 모델 출신'으로만 봤고, 군 관계자들은 총탄이 오가는 곳에 여성이 들어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 밀러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전투의 한복판에 들어가 폭격의 잔해 속을 걸었고, 병사들과 함께 피난소에서 잠들었으며, 강제 수용소에서 시체들을 마주했다.
그녀의 렌즈는 단순히 전쟁의 파괴만 보여주지 않는다. 그 속에서 인간을, 여성을, 생존을 포착한다. <리 밀러>는 그렇게 '여성 시선의 전쟁 기록'을 되짚는다. 전쟁이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다면, 리 밀러의 사진은 '인간 본성에 대한 증언'이었다.
영화는 리 밀러를 신화화하지 않는다. 그녀를 영웅으로 그리기보다 불안과 트라우마, 자기혐오까지 솔직하게 드러낸다. 전쟁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공허함이 그녀의 눈빛에 남아 있다. 그래서 영화의 감정선은 화려한 전쟁 서사보다 고요한 절망과 회복의 리듬을 따른다.
완벽하지 않아도, 잊히지 않는 이유
▲영화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리 밀러>는 촬영감독 엘렌 쿠라스의 첫 연출작이다. 그녀는 <이터널 선샤인>으로 유명한 촬영감독이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해온 '이미지'의 세계를 직접 이야기로 풀어냈다. 케이트 윈슬렛,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마리옹 꼬띠아르 등 이름만으로도 눈부신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영화의 매력은 스타 캐스팅이 아니라 '시선'에 있다.
다만 영화적 완성도 면에선 아쉬움이 남는다. 전쟁 장면의 스케일이나 감정선의 깊이에서 1990~2000년대의 고전적인 전쟁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새로움은 부족하다. 이미 수많은 작품들이 전한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또다시 재현하는 게 과연 필요한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빛나는 지점은 분명하다. 바로 리 밀러의 존재 그 자체다.
그녀는 전쟁을 '찍은' 여성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자신을 찍은' 사람이다. 영화 속 리 밀러는 성장하고, 각성하고, 마침내 자신이 왜 카메라를 들었는지 깨닫는다. "나는 찍히는 것보다 찍는 일이 더 좋다"는 말은 단순한 직업적 선언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정의였다.
엘렌 쿠라스는 리 밀러를 통해 '기록의 윤리'를 묻는다. 인간이 인간을 찍는다는 것, 고통을 남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는 바로 그 질문을 던진다. 결국 이 영화는 전쟁의 잔혹함보다, 카메라를 든 인간의 책임에 대해 묻는 작품이다.
▲영화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포스터.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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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히는 것보다 찍는 게 좋다"는 선언 이후 그녀가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