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번 출구> 스틸.
미디어캐슬
원작 게임의 이상 현상이 순수한 공포 장치였다면, 영화는 인물의 심리적 투사물로 재해석한다. 벽에서 흐르는 피, 포스터 속 눈동자들, 락커에서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와 두드림. 이것들은 무작위로 만들어진 공포가 아니라 인물의 무의식적 기억과 직접 본 SNS 게시물의 파편들이다.
영화는 원작에 없던 코인 락커와 사진 부스를 추가하는데 이 공간들은 현대인이 자신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장소다. 락커 속 두드림은 갇혀 있는 또 다른 자아의 신호이며, 사진 부스는 끊임없이 자신을 복제하고 증명해야 하는 강박을 시각화한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영화 후반부 자신의 행동을 창 너머로 바라보는 것 같은 묘사에 있다. 길을 잃은 남자는 마치 건너편 창가 너머로 타인을 바라보듯, 자신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 갓난 아이를 데리고 탄 여성을 외면했던 지하철 장면을 다시 목격한다. 그 행동을 후회하지만 다시는 개입할 수 없다. 게임의 관찰자 시점이 영화적 거리두기로 전환되는 순간, 영화는 이 이상현상이 외부의 공포가 아니라 인물 내부의 균열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영화는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되돌아가라'는 게임의 규칙을 충실히 따른다. 여기서 되돌아가는 행위는 물리적 회귀가 아니라 자신이 과거에 외면했던 순간을 제대로 직시하라는 지시이자,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을 다시 마주하게끔 하는 것이다.
8번 출구, 탈출과 구원
숫자 8을 눕히면 무한대(∞)가 된다. 영화는 이런 농담 같은 시각적 유희를 존재론적 질문으로 확장한다. 8번 출구는 탈출구인 동시에 영원한 순환의 표식이다. 주인공들이 찾아 헤매는 것은 반복되는 공간을 벗어나기 위한 출구가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 매순간마다 들이닥치는 선택의 순간을 유보하는 자책감, 인간관계의 단절로부터 스스로를 탈출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자기구원의 행위에 가깝다.
영화는 게임이 제공했던 즉각적인 공포 대신 지속적인 불안을 선택한다. 점프 스케어는 최소화하고 반복되는 복도와 형광등 소리, 반복되는 효과음과 발자국 소리로 일상적인 공포를 만들어 화면을 서서히 잠식하게 유도한다. 사람들 다수가 매일 경험하는 출퇴근길의 단조로움, 챗바퀴 같은 일상의 소리들이다. 게임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조종하며 시점을 통제하듯, 길을 잃은 남자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본다. 하지만 관조할 뿐 행동을 통제할 수는 없다. 이미 일어난 일, 선택하지 않은 순간은 변경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순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리미널 스페이스에서 사회적 공간으로
▲영화 <8번 출구> 스틸.미디어캐슬
< 8번 출구 >는 주요 공포 요소인 리미널 스페이스를 사회적 공간으로 전환시킨 데 있다. 텅 빈 지하도는 비현실적 공포의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통과하는 도시 공간의 상징이다.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당신은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는가. 선택하지 않고 회피하는 행동이 만들어낸 후회의 무한 루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 영화는 게임의 핵심 요소를 차용해 사회적 공포를 이식시켜 창조적으로 결합한 사례다. 카와무라 겐키 감독은 게임의 메커니즘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것을 통해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쓰나미 같은 불확실성이 일상을 덮친 시대에 < 8번 출구 >는 우리 모두가 플레이어이자 관객고 동시에 일상의 방관자임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마지막, 8번 출구를 찾은 주인공이 마주하는 것은 또 다른 지하철 플랫폼이다. 탈출은 곧 새로운 입장이며, 구원은 다시 선택의 순간으로 이어진다. 게임이 엔딩 후 처음으로 돌아가듯 우리의 일상도 매일 아침 리셋된다. 영화가 남긴 질문 또한 계속된다. 오늘, 당신은 이상 현상을 발견했을 때 되돌아갈 것인지, 그것을 이상현상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그 선택이 만들어낼 또 다른 무한 루프를 우리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 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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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직 노동자 겸 플랫폼 노동자. 음악-영화-책 감상이 유일한 취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