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기술로 탄생한 첫 장편 상업영화, 흥행보다 중요한 게 있다

[넘버링 무비 523] 영화 <중간계>

 영화 <중간계> 스틸컷
영화 <중간계> 스틸컷CJ CGV

01.
강윤성 감독의 이름 아래에는 산업의 상업적 구조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시작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제는 어엿한 시리즈물이 된 <범죄도시> 이후 그의 행보는 한국 장르 영화의 동력과 문법이 대중에게 여전히 유효함에 대한 증명과도 같았다. 드라마와 OTT 산업으로 이동한 뒤에도 그의 연출과 기획력이 관객(시청자)이 원하는 바를 읽고 만족시키는 데 충분하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입증되었다. 그런 감독이 영화 <중간계>를 통해 기술적 실험을 시도한 것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면서도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기존의 흥행 프랜차이즈 시리즈물과의 거리를 잠시 두고서라도 산업의 기술과 형식을 선도하겠다는 야심이 여기에 있다.

영화 <중간계>는 드라마적으로 단순한 틀을 갖고 있다. 동남아 등지에서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며 수천억을 축적한 재범(양세종 분)을 추적하던 국정원 블랙 요원 장원(변요한 분), 형사 민영(김강우 분)과 배우 설아(방효린 분), 책임 PD 석태(임형준 분) 등의 인물이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간계로 향해 갇히게 된 이들은 12지신의 탈을 쓴 저승사자들에게 쫓기며 현실과 닮아 있는, 알 수 없는 공간을 떠돌게 된다. 자신들의 영혼을 거둬가려는 존재들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02.
"저승사자들이 세상에 떠도는 영혼들을 정리하는 거지."

이 작품이 상업 장편 영화로는 드물게 60여 분의 러닝타임을 갖고 있음에도 주목되는 것은 한국 상업영화 시장에서 AI 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첫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AI를 활용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두 10분에서 20분 사이의 짧은 단편으로만 제작되어 왔을 뿐이다. 강윤성 감독은 크랭크인 시점으로부터 4개월 정도 만에 개봉할 수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이 역시 컴퓨터그래픽(CG)에 필요한 모든 장면을 대신 AI를 활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CG로는 몇 달이나 걸릴 작업이 단 몇 시간 만에 끝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극 중에 등장하는 저승사자, 사천왕, 해태 등의 크리처들을 모두 그렇게 완성되었다. 물론, 연기는 실제 배우들이 모두 직접 했다.

사실 강윤성 감독이 택한 영화 <중간계>의 제작 방식은 이승과 저승 사이라는 이 영화의 서사가 갖고 있는 개념과도 같이 산업적으로도 경계에 놓여 있다. 기존의 CG 방식을 보완하면서 생성형 AI를 결합하는 실험은 산업의 비용 구조와 제작 일정을 무너뜨리고 재편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해서다. AI의 도입은 단순히 CG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영화 제작의 두 축을 직접적으로 해체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제작비 측면이나 배급 구조, 리스크 등을 이유로 점차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는 국내 상업영화 산업에는 새로운 동력이 될 가능성마저 안고 있다.

 영화 <중간계> 스틸컷
영화 <중간계> 스틸컷CJ CGV

03.
물론 이는 기술적, 산업적 측면에서 낙관적으로 생각했을 때의 이야기다. 관객 모두가 영화를 동일한 기준과 잣대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기술이 산업에 안정적으로 안착하지 못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그만큼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는 뜻이다. 당장은 기본적인 서사적 측면이 과제로 남는다. 기술적 혁신이 서사의 내러티브나 감정적 유대까지 모두 확보해 주지는 못한다. 기술이 극의 서사적 요소와 매끄럽게 호흡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통한 감각적 체험이 인물과 공간, 감정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만 한다. 영화 <중간계>가 그나마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이 이미 오래전부터 구상해 왔던 시나리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번 영화는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 이전에 완성된 바 있는 <뫼비우스>라는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짧은 러닝타임으로부터 비롯되는 서사의 빈곤함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화는 이 지점을 메우기 위해 후반부 몰아치는 액션의 서스펜스와 곳곳에 숨겨둔 해학적 요소를 활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사건 사이의 명확한 연결 대신 이미지의 과잉으로 대체하는 과정은 인물의 동기나 관계의 세부 지점들이 장면의 추력에 의해 힘을 잃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후반부의 이야기가 2부를 통해 이어질 것이라고 암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서사에 존재하는 서사적 공백이 효과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04.
새로운 기술적 토대 위에서 완성된 영화 <중간계>가 가지게 되는 의의는 어쩌면 영화 바깥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여러 가지 질문과 논의를 탄생시키게 될 것이 분명해서다. 더 많은 영화와 창작자가 큰 비용이 들 법한 난이도 높은 장면에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거나 전체 작업 일수를 줄이는 등의 비용 측면의 도움을 받게 되는 부분은 긍정적 측면에 속한다. 다만 여기에는 고도화된 기술이 제작자와 배우, 스태프 등의 직종을 대체하며 일자리를 위협하게 되거나, 관객 수용의 측면에서 혁신이 아닌 단순한 오락적 기술로 전락하게 될 수 있다는 등의 부정적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기술 전환은 제작 환경의 전환을 피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CG가 도입되던 초창기,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몇몇 작품에서의 거대한 실패 사례처럼, AI 기술이 새로운 질감을 낳는 영화적 기술이 아니라 CG의 값싸고 쉬운 대체제가 될 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을 정도의 기술적 안착은 반복되는 시도 속에서 기술 발전과 연출자의 경험이 더해지며 적절한 경계를 찾을 때에야 가능해질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영화 <중간계> 스틸컷
영화 <중간계> 스틸컷CJ CGV

05.
"AI는 단순한 보조 도구가 아니라 영화 제작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키워드다."

현실과 허구, 인간과 저승, 전통적 방식과 새로운 기술 등, 강윤성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경계'의 메타포를 온몸으로 강조해 내고 있다. 확정된 결과물이라 할 수 없고, 이제 시작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부딪힘에 가깝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언젠가는 누군가 지나야 할 문턱이자 경계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이 글에서 이야기했던 생성형 AI 기술의 장단과 산업에 던져질 질문 모두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한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기술적 실험과 장르적 도전을 모두 시도한 작품으로 영화 <중간계>는 한 번쯤 지켜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완성도나 몰입감 면에서는 아직 개선될 여지가 있지만, 한국 상업영화가 AI 기반 후반작업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처음으로 그 답을 확인해 볼 수 있어서다. 여기에 더해, 다음 작품에서는 제작 기간 대비 얼마나 더 개선된 기술적 활용을 보여줄 것인지, 어떤 방식을 통해 드라마에 녹아들 수 있게 될지 지켜볼 수 있게 되는 점 또한 하나의 흥미가 될 것이다.
영화 중간계 변요한 김강우 방효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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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