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의 사랑 다룬 '세계의 주인'... 윤가은 감독 "오히려 일상 그리고자 했죠"

[인터뷰] <세계의 주인> 윤가은 감독

 영화 <세계의 주인>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
영화 <세계의 주인>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주)바른손이앤에이

학교 폭력과 아이들 간 계급주의를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온 윤가은 감독이 청소년의 성과 사랑을 들고 6년 만에 관객과 만난다. <우리들>과 <우리집>에서 아이들의 세계를 꾸준히 그려온 그는 <세계의 주인>이라는 작품에서 청소년들이 남모르게 겪고 있을 깊은 고민을 다룬다. 20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윤가은 감독은 "10년도 더 된 이야기로 오래 품고 있었다"며 내놓기까지의 고민을 밝혔다.

<세계의 주인>은 제목처럼 고교 2년인 주인(서수빈)이 겪는 성장통과 연대의 힘을 밀도 높게 그린다. 운동도 공부도 잘하고 반장으로서 친구들과 관계 또한 원만한 수빈은 유독 연애에서만큼은 장벽을 느낀다. 그러다 본인에게 전해지기 시작한 의문의 쪽지들로 마음의 동요를 느끼게 되고, 마침 친구가 요청한 전교생 서명운동에 유일하게 반대하면서 모종의 갈등을 겪는 과정을 그린다.

윤가은 감독은 해당 이야기를 단편 영화로 구상했던 시기를 언급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전문사 과정 당시 청소년들이 직접 경험하는 사랑과 성, 연애를 사실적으로 그려보고자 했지만 그때마다 공포와 불안을 함께 묘사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쉽사리 완성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됐다. 원래 준비하던 드라마 시리즈가 엎어지고, 극장들도 영업이 어렵다는 소식이 들리던 차였는데 예전에 쓰다만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피하지 말고 해보자고 마음먹고 여러 연구와 사례, 후기집들을 찾아봤다. 그러다 이금희 작가의 <유진과 유진>을 다시 읽게 됐는데 그 소설의 활기와 명랑함에 매료돼 그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고통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다

정확히는 과거의 상처로 고통받는 이들을 감독 입장에서 어떻게 다루는지가 문제였다. 방황하던 윤가은 감독에게 하나의 실마리가 된 건 엘렌 베스, 로라 데이비스의 공동 저서 <아주 특별한 용기>였다고. "큰일을 겪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 벌어진 일에 매몰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노력하는 데에 힘을 더 기울인다는 그 문장이 길을 열어준 셈"이라 그는 말했다. 여기에 더해 전신 화상을 극복하고 대학교 강단에 서고 있는 이지선 교수의 이야기도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당신들 삶에 희노애락이 있듯 내 삶도 그렇다는 걸 알아달라는 말씀에 이거다 싶었다. 각자가 겪은 여러 상처가 있는데 그 세기를 전 감히 가늠할 수 없잖나. 내가 그 상처들을 품고 드러낼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리자고 생각했다. 그걸 묘사하는 순간 또 하나의 전형성을 만드는 것이니까. 내 한계를 인식하고, 고통의 순간은 묘사하지 않지만 충분히 상상할 여지를 주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들의 일상을 충분히 그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영화 <세계의 주인>의 한 장면.
,영화 <세계의 주인>의 한 장면.㈜바른손이앤에

방향을 잡은 이상 출연 배우들이 중요해졌다. 두 편의 전작에서 모두 연기 워크샵을 열어 아역 배우를 발굴한 윤 감독은 이번에도 여러 오디션 과정을 거치며 서수빈이라는 신인 배우를 발탁했다. 오디션과 워크샵 기간까지 합치면 약 3개월의 캐스팅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기성 배우를 쓰지 않는 어려운 길을 택해온 것에 그는 "의도는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됐다"고 답했다. "여러 기성 배우를 만나기도 했는데 서수빈 배우를 봤을 때 평범한 얼굴 너머로 보이는 총기가 있었고, 보통 아이들 같은 생기가 있으면서 뭔가 운동을 했을 것만 같은 기합이 들어 있었다"며 윤 감독은 "실제로 알고 보니 태권도를 11년간 해왔더라. 원래 시나리오에도 있었던 설정인데 운명인가 싶었다"고 말했다.

"정말 잘하는 기성 배우들이 많다. 하지만 제게 1순위는 20대 배우들이라도 진짜 청소년인 것처럼 믿어지게 하는 거였다. 하루에 10명, 20명씩 만나면서 마음이 더 갔던 게 그래서 신인배우들이었던 것 같다. 사실 저 혼자만의 것은 아니고 인물 조감독님, 그리고 담임 선생님을 연기한 이상희 배우님의 공이 정말 컸다.

가람고 학생들 역할이 캐스팅된 이후 갑자기 등산을 가자고 하시더니 산 정상에서 배우들 한 명 한 명 불러서 연기는 왜 하고 싶은지 등의 대화를 진솔하게 나누셨더라. 정말 담임처럼 임하셨다. 그날 이후 촬영에서 뭔가 다른 에너지들이 생기고 배우들이 내어놓고 자기 이야길 하게끔 됐다."

영화에서 주요하게 작용하는 게 수빈이가 받는 익명의 쪽지다. 과거의 상처를 고백한 수빈을 향해 비난하고 의심하는 내용이 담긴 그 쪽지를 대체 누가 보내는 것인지 영화는 드러내지 않는다. 결말 때까지 수빈을 혼란스럽게 하는 장치로, 결국 수빈에 대한 모종의 화해 혹은 이해로 나아가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

"사실 그 쪽지 내용은 심각한 상처, 재난을 겪은 사람들에게 온라인상에서 여러 사람들이 내뱉는 떠도는 말들의 조합이었다. 촬영 감독님은 그게 마치 주인의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같다고도 하셨는데, 그 말도 맞다고 본다. 우린 끝없이 의심하잖나. 그런 일을 겪고도 정말 괜찮은지 말이다. 스스로 공격하는 말을 하기도 하고, 결국 무너뜨리기도 하는데 우리 안에 울려퍼지는 여러 말들이다."

"이름 모를 좋은 어른들 또한 세계의 파수꾼"

<세계의 주인>에서 학생들과 함께 면밀히 봐야 할 존재들이 바로 이들 주변에 존재하는 어른들이다. 담임 선생님 역의 이상희, 주인의 엄마 태선 역의 장혜진과 아빠 역의 김석훈, 그리고 주인이 다니는 태권도장 관장 역의 이대연 등이 각각 아이들 세계를 지켜주는 좋은 어른으로 분했다.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실수를 많이 한다. 어린이 배우들과 10년 이상을 일했지만, 제 조카에게는 물론이고 여러 잘못을 하더라. 그런 걸 줄이려고 노력하면서 책임지려는 게 어른이 아닐까 싶다. 주인의 부모도 이상적인 부모가 아닐 순 있어도 최선을 다하는 부모라 생각했다. 실제 자료 조사를 하면서 가족의 대응 때문에 아이들이 더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더라. 아이들이 겪은 상처가 개인의 불행만은 아니기에 부모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태권도장 관장님은 제가 처음 시나리오 쓸 때부터 지키고 싶은 캐릭터였다. 저도 태권도를 배운 적이 있는데 너무 좋은 사범님을 만났었다. 알게 모르게 이런 분들처럼 우리 사회를 지켜주는 파수꾼 같은 분들이 있다. 돌아보면 저도 그런 어른들 덕에 위기를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 분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이름도 알 수 없지만 옆에 계셔주신다. 영화 속 주인이 옆에 좋은 언니들이 있었듯, 남성 어른 중에서도 그런 존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린 캐릭터다."

 ,영화 <세계의 주인>의 한 장면.
,영화 <세계의 주인>의 한 장면.㈜바른손이앤에

<우리들>(2016)로 데뷔 후 꾸준히 아이들과 청소년을 담아 온 윤가은에게 '영화계의 방정환'이라는 재치 있는 수식어가 붙긴 하지만, 그 또한 감독이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아빠의 불륜을 바라보는 소녀를 다룬 단편 <손님>, 엄마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7살 어린이를 그린 단편 <콩나물>을 비롯, 윤가은 감독의 영화는 늘 자기 안에서 자연발생하는 이야기였음을 그는 고백했다.

"다른 분들에겐 특수하다 느껴질 수 있지만, 제겐 크게 특수한 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왜 영화를 하고 있는지 그 이유와 관계가 깊은 것 같다. 감독마다 영화를 하는 이유가 다를 것인데 제가 유독 영화를 많이 봤던 게 어린이, 청소년 시기이기도 했다. 제가 이야기꾼도 비주얼리스트도 아닌데, 특히 제 마음을 움직인 영화를 떠올리면 나 같은 사람을 이야기해주는 작품이더라.

다이안 퀴리라는 프랑스 여성 감독의 <박하향 소다수>(1977) 같은 영화가 있었다. 어렸을 때 TV에서 방영한 건데 부모님이 이혼한 아이가 여름 한 철을 보내며 겪는 이야기였다. 집에 불화가 있는 아이를 섬세하게 표현한 영화를 보며 확 몰입한 경험이 있다. 우리 집에도 불화가 있는데 이런 삶도 있구나 어린 마음에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이번 영화도 6년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세상에 태어나지 못할 뻔했다고 한다. 윤가은 감독은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 상업적으로 위험하다는 얘길 너무도 많이 들었는데 막상 공개되고 좋은 반응이 나오니까 어쩌면 다들 기다렸던 이야기 아닌가 싶다"며 "앞으로 또 영화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란 사람의 경험이 적은 만큼 내려놓고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삶에 더 맡겨 보려 한다"고 속마음을 전했다.
세계의주인 윤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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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