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원짜리 디카로 찍은 할머니, 이 다큐가 주는 울림

[김성호의 씨네만세 1195] 마침 내 극장 - 사양되는 것들을 위하여 <퍼니스트 홈비디오, 코리아>

독립영화, 그중에서도 다큐멘터리는 한국 영화산업의 한 극단이 처한 척박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 해 제작되는 다큐멘터리 가운데 극장에서 개봉을 하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다. 지난해 한국 독립예술영화가 개봉에 이른 비율은 전체 제작 편수 대비 67.1%에 불과하다. 전년 대비 15%p 가량 감소한 수치다. 극영화에 비해 다큐가 처한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다.

2024년 단 하루라도 극장에 걸린 다큐는 모두 62편, 이 중 한국 작품은 39편이다. 이 중 한국 독립 다큐 가운데 주목할 만한 영화로 판단해 '씨네만세'를 통해 소개한 작품이 여럿이다. 이를테면 <되살아나는 목소리> <잠자리 구하기> <양지뜸> <조선인 여공의 노래> <판문점> <생츄어리> <면접교섭> 등은 하나 같이 한국 독립다큐의 기대작으로, 다큐 깨나 보는 이들 사이에서 각각 상당한 명성을 얻은 영화들이다.

그러나 이들 영화가 얼마만큼 상영됐는지를 돌아보면 그저 민망할 뿐이다. 영진위 자료를 찾아보면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당시 전국 극장 전체 상영횟수 1만 4645회 중 45회, <잠자리 구하기>는 1만 5021회 중 27회,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1만 9760회 중에서 52회만 상영기회를 얻었다. <생츄어리>는 1만 8147회 중 75회, '뉴스타파'란 팬층 두터운 매체가 제작한 <판문점> 정도가 1만 7165회 중 95회를 상영해 나은 편이다. 2024년 가장 성공한 독립다큐라 불린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2만 243회 중 96회 상영됐다. 반면 <면접교섭>은 2만 501회 가운데 단 9회 상영됐다. 가장 심각한 경우는 <양지뜸>으로 1만 7779회 중 단 5회만 상영기회를 얻었다. 모두가 개봉일 당일 기록이다.

지난해 극장에 많이 걸린 다큐들을 돌아보면 사정을 더 자세히 알 수 있겠다. 중국 태생 팬더곰 푸바오가 주연으로 등장한 <안녕, 할부지>는 개봉일 3251회 상영되며 당일 전국 극장 상영횟수 중 20%를 넘게 차지했다. 한국에서 팔리는 다큐의 한 축을 형성한 다음의 작품군 <임영웅: 아임 히어로>와 <오빠, 남진>은 각 1000회와 200회 차 상영을 훌쩍 넘겼다. 또 다른 흥행축이라 해도 좋을 정치다큐, 그중 성공작인 <길 위에 김대중>도 500회 차 상영을 넘어섰다. 이쯤이면 되는 다큐와 되지 않는 다큐가 어느 지점에서 갈라지는지를 알 만도 하다.

마침 내 극장 <퍼니스트 홈비디오, 코리아>가 상영된 공간, 일리 마당 한 켠.
마침 내 극장<퍼니스트 홈비디오, 코리아>가 상영된 공간, 일리 마당 한 켠.마침 내 극장

소외된 한국 독립다큐에 자리를 허하라

작품성이 아니다. 완성도가 아니다. 사회적 유효함이며 주제의식의 가치 또한 아니다. 극장에 걸리는 다큐는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장편 다큐 가운데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영화제를 통해 높은 평가를 받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배급된 작품들마저도 상황이 이러하다. 푸바오며 임영웅, 김대중과 같은 거물들에겐 당연히 밀리는 게 마땅한 것일까. 그리하여 이른 아침 작은 상영관에서 수십 차례 상영되는 것으로, 도시마다 단 하나의 상영관도 얻지 못하는 일을 감내해야 하는 걸까.

'씨네만세'를 통해 거듭 작은 독립 다큐들을 언급하고 소개하는 이유, 그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떻게든 유효한 목소리를 전하려는 의지의 표명이다. 결코 소실되어선 안 되는 매체와 작가, 도전들을 응원하려는 마음이다. 독립 다큐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실 가운데서 어떻게든 흐름에 맞서려는 작업이다.

이달 같은 뜻을 안고 일어난 보기 드문 행사가 하나 있었다. 관객과 접점 없는 독립 다큐 가운데 아까운 작품을 모아 진행하는 독특한 상영회다. 이름하야 '마침 내 극장'으로, 지난 2017년에 이어 8년 만에 열리는 반가운 행사다. 지난 2017년 '마침 내 극장'은 서울 아현동 50년 역사를 가진 폐 목욕탕 행화탕에서 여덟 편의 다큐를 선보였다. 참여한 감독들이 직접 설계한 공간에서 맞춤 상영을 가진 전시형태의 결합으로, 영화제 외엔 마땅히 작품을 선보일 기회가 없는 독립 다큐 감독과 그를 접하고자 하는 관객에게 귀한 장이 되어준 바 있다.

올해는 '사양되는 것들을 위하여'란 부제와 함께 서울 종로구 세검정로에 위치한 '공간: 일리'에서 나흘간의 상영회를 진행했다. 10월 1일부터 4일까지 열린 상영회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참여한 감독들이 직접 공간을 꾸미고 제 작품의 콘셉트와 어우러진 환경에서 작품과 관객이 만나도록 준비했다. 오래된 구옥을 개조해 공간대여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장소가 8년 전 전시의 성격을 얼마쯤이나마 계승하는 가운데, 상영한 6편의 작품, 5명 연출자의 개성이 물씬 묻어난다.

마침 내 극장 서울 세검정 일대 구옥을 개조한 공간, 일리에서 진행된 마침 내 극장 전시. 공간 곳곳을 감독이 직접 제 영화에 걸맞는 상영장소로 바꾸었다.
마침 내 극장서울 세검정 일대 구옥을 개조한 공간, 일리에서 진행된 마침 내 극장 전시. 공간 곳곳을 감독이 직접 제 영화에 걸맞는 상영장소로 바꾸었다.마침 내 극장

냉혹한 시대 사양되는 작고 소중한 것들

상영작 가운데 김국희 감독의 단편 <퍼니스트 홈비디오, 코리아>란 작품이 있다. 14분짜리 짤막한 단편은 행사장 마당에 마련된 열린 공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올해 제26회 대구단편영화제, 제10회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 제17회 대단한 단편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 초청돼 상영된 바 있는 작품으로, 올해 나온 단편 가운데 제법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다큐다.

제목인 '퍼니스트 홈비디오, 코리아'는 노골적으로 지난 시대 유행했던 미국 방송프로그램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 방송에서도 종종 가져와 소개했던 '퍼니스트 홈비디오'는 시청자가 보내온 직접 촬영한 일상 속 웃긴 영상들을 이어붙여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가벼운 몸개그부터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빚어진 슬랩스틱 코미디, 친구나 가족에게 친 장난이나 동물의 행동에 이르기까지 웃기기만 하다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방송의 소재로 삼았다. 김국희 감독은 이 프로그램 이름에 한국을 의미하는 '코리아'란 단어를 붙여 제 영화의 지향을 드러낸다. 결코 무겁지 않게, 심지어 코미디적 영상을 의도했다는 뜻이겠다.

그런데 웬걸. 막상 상영되는 영화는 그 제목과는 전혀 딴판이다. 짤막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감독 자신의 인생역경을 총망라한, 그것도 이 시대 평범한 삶에 비하여 다분히 고단하고 괴로웠을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감독은 당근마켓에서 5만 원에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했다고 했다. 이 디카를 가지고 그녀는 홈비디오 한 편을 찍기로 결심한다.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김국희 감독의 할머니는 카메라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사람이다. 무얼 잘못한 것도 아닌데, 카메라 앞에 서길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제 삶의 현재를 긍정하기 어려운 때문일 테다.

퍼니스트 홈비디오, 코리아 스틸컷
퍼니스트 홈비디오, 코리아스틸컷마침내극장

5만 원에 산 디카로 찍은 다큐

김국희 감독은 그를 뒤집어낸다. 아무리 보아도 제게 있어 할머니는 자랑스럽고 훌륭한 사람이어서다. 어째서 그러한가. 그는 감독의 아픈 가정사에 기인한다. 감독은 담담히 그를 풀어낸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집을 나간 뒤 빈 집에 홀로 남아 있던 어린 시절과 그 사실을 안 뒤로 저를 데려가 길렀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퍼니스트 홈비디오, 코리아>, 그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구술된다. 할머니에게 손녀 김국희가, 김국희 감독에겐 할머니가 서로의 유일한 가족이 된다.

할머니의 삶은 지난 세기 한국을 일으킨 산업의 중심에 자리한다. 서울 봉재공장에서 시다로 입사해 성실히 일했다. 그 시절 대다수 노동자가 그러했듯 쉬는 날 없이 성실히 일했으나 손에 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랜 노동 끝에, 또 운이 닿은 결과로써 어찌어찌 일산에 아파트 한 채를 얻었으나 자식의 빚 때문에 그를 잃었다고 했다. 그 자식이 바로 김국희 감독의 엄마였다.

김국희 감독이 바라본 할머니는 일생을 성실히 살았으나 오늘날 손에 쥔 것은 얼마 없는 이 시대 평범한 이다. 그런 그녀를 감독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제 유일한 가족이며, 기꺼이 카메라를 들어 기록해 마땅한 삶을 산 이라고 얘기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그를 설득해낸다. 감독은 사랑이란 필사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필사적으로 살아내는 것은 어째서 사랑이 되는가. 그는 영화 속 힘겨운 순간들을 할머니와 손녀가 견뎌내는 모습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할머니에겐 손녀가, 손녀에겐 할머니가 유일한 가족으로 존재한다. 서로에게 서로가 존재할 이유가 된다. 그렇기에 그들 각자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상대를 위해서라도 내 삶을 지켜내야 한다. 버텨내야 한다. 필사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살아내는 것은 그렇게 사랑이 된다. 남을 위하여 나를 위하는 역설을 이룬다.

마침 내 극장 포스터
마침 내 극장포스터김다영

필사적으로 살아내는 일, 그는 바로 사랑이다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이 짧은 영화가 설한다. 영화의 말미, 김국희 감독은 스스로 할머니의 기대나 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얼마쯤 벗어나 있음을 고백한다. 통상적이라면 일반적인 길, 이를 테면 안정된 곳에 취업하고 좋은 조건을 가진 이와 인연을 맺어 모범적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어렵게 저를 기른 할머니에 대한 보답이라 여길 수 있을 테다. 그러나 감독은 세상 더없이 불안정한 업, 영화를 찍는 일에 열과 성을 기울인다. 그건 이기적인 일이다. 저의 꿈만 좇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야말로 할머니가 얼마나 성공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건 아닐지. 적어도 사랑에서만큼은 말이다. 할머니를 사랑하여 필사적으로 살아내는 법을 배운 손녀는, 제 삶과 꿈을 굽히지 않는 용기를 갖췄다. 나아가고픈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내는 힘을 얻었다. 그렇다. 한 인간이 이기적일 수 있기까지, 그러니까 저 자신을 위할 수 있기까지 주변의 지지와 사랑이 중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김국희에게 할머니가 바로 그런 존재다.

<퍼니스트 홈비디오, 코리아>는 디지털카메라를 활용한 영상에 AI와 전자음성을 적극 더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난 세기를 살아온 잊혀져 가는 존재인 할머니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20대 청춘인 감독이 기록했단 점이 어딘지 5만 원짜리 디지털카메라와 최신 AI기술의 이색적 만남과 어울리는 듯도 하다.

사라져 가는 것을 그저 사라져가는 대로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움직임, 마침 내 극장을 나는 그와 같이 이해한다. 행사를 기획한 김다영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것이 변명은 아닌지, 현상이 타당한지, 성찰 없이 무조건적으로 시대를 수용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이 들"어 8년 만에 마침 내 극장을 부활시키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이번 행사의 주제가 '사양되고 핍박받는'인 것도 그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번 행사에서 <퍼니스트 홈비디오, 코리아>가 상영된 건 참 어울리는 일이다. 디지털 카메라도, 할머니가 구태여 꺼내지 않으려 드는 그녀의 지난 삶도 오늘의 세상에서 사양되어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당근마켓에서 5만 원을 주고 누군가에겐 쓸모없어진, 그러나 기능은 아직 여전한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한 감독은 그를 들어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리고 그를 실제로 얼마간 해낸다. 더는 쓸모없다 여겨지는 것에게서 여전한 쓸모를 발견하는 것, 시들었다 여기는 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 그것이 이 영화와 이 행사의 지향인 것이다. 박수를 보낸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침내극장 사양되는것들을위하여 김국희 김성호의씨네만세 퍼니스트홈비디오코리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