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할 수 없었던 여성의 삶, 쾌활했던 반장은 왜 그랬을까

[미리보는 영화] <세계의 주인>

 ,영화 <세계의 주인>의 한 장면.
,영화 <세계의 주인>의 한 장면.㈜바른손이앤에

오래 알고 지냈던 한 이성 친구와 몇 년 전 나눈 대화가 기억났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여자라면 겪는 일일걸?" 이 한 마디가 적확하게 와닿진 않았던 것 같다. 잊고 지냈던 그 말은 이후 여러 여성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어렴풋이 간접 경험했던 여성의 삶은 결국 오롯이 상상할 수도 없고, 나의 경험이 될 수 없기에 그저 이해해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눙치곤 했던 것 같다.

오는 22일 개봉하는 영화 <세계의 주인>이 놀라운 이유는 한 고교생의 시선과 그 주변 사람들로 끊임없이 상상하게 하고 기어코 이들이 하고 싶은 말을 아주 정확하게 그것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급 반장에 교우 관계도 좋고 운동과 연애에 두루 왕성한 대문자 E 성향의 주인(서수빈)이를 통해 말이다.

평범해 보이는 주인의 고민은 무엇일까. 연애는 매번 한 달 이상을 넘기기 힘들고, 집을 나간 채 은둔해 있는 아빠(김석훈)와는 연락이 잘되지 않고, 상한 마음을 술로 달래는 엄마 태선(장혜진)는 다소 위태로워 보인다. 정기적으로 나가는 봉사활동, 태권도 학원, 그리고 친구들과의 수다가 주인의 숨 쉴 구멍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만으로 영화가 완성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 놀라운 전개가 이어진다. 감독은 친구들과 관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고교생의 세계를 더욱 들여다본다.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를 묘사하는 게 아니라 주인의 의도와 달리 틀어지고, 변모하는 관계에 천착하며 이 소중한 개인들이 어떻게 절망하고 또 희망을 갖기도 하는지를 점층적으로 전달하는 식이다.

무난해보이는 주인의 세계가 흔들리는 건 한 흉악범죄자의 석방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동네 이웃으로 이사 올 수도 있다는 소식에 학교는 뒤숭숭해지고 그에 따라 주인을 둘러싼 공기도 달라지게 된다. 석방 반대 서명을 펼치는 방송반 친구 수호(김정식)에게 심통을 부리는 주인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이들의 삶이 내 가족, 친구, 지인의 일임을 체험하게 된다.

 ,영화 <세계의 주인>의 한 장면.
,영화 <세계의 주인>의 한 장면.㈜바른손이앤에

 ,영화 <세계의 주인>의 한 장면.
,영화 <세계의 주인>의 한 장면.㈜바른손이앤에

단편 <콩나물>, 그리고 장편 <우리들>(2016), <우리집>(2019)으로 아이들의 현실을 세심하게 조명해 온 윤가은 감독이 청소년의 그것에 초점을 맞췄다. 사춘기를 겪는 한 소녀의 성장기라는 납작한 주제가 아닌, 함께 현실을 살아가고 갈등을 이겨내는 세상 모든 주인에게 손을 뻗는 용기가 곳곳에 서려 있다.

단순히 선하고 명료한 주제 의식이 전부가 아니다. 아역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실존하고 있는 듯 장면 곳곳에서 살아 움직인다. 고립된 것만 같은 주인의 심정을 영화적 장치로 빈틈 없이 은유한다. 대놓고 주제를 강요하지 않고, 때론 따뜻하거나 때론 엄하게 주인 곁에 존재해온 여러 이웃들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한국 여성, 아니 세상 모든 여성들의 삶이 <세계의 주인>을 통해 분명한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게끔 한다. 영화의 본질이란 건 바로 이 상상하게 하는 힘에 있다. 이제 막 세 편의 장편을 내놓는 감독의 손길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는 촘촘하고 진정성 또한 충분히 담겨 있다. 영화 산업의 침체기에 이런 빛나는 창작자의 존재가 새삼 더욱 소중해진다.

한줄평 : 올해 그토록 목말랐던 영화의 등장
평점 : ★★★★(5/5)

제목(영제) : 세계의 주인(The World of Love)
각본 및 감독 : 윤가은
출연 : 서수빈, 장혜진, 김정식, 강채윤, 이재희, 김예창
제공 및 배급 : ㈜바른손이앤에
제작 : ㈜세모시, 볼미디어㈜
개봉 : 2025년 10월 22일




세계의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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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